닌텐도 117년의 역사

Game 2006. 2. 15. 17:22 |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dreamwiz.com )의 NGC > 게임 게시판 > 정보 게시판링크의대모험 님의 글

1889 ◆히로시씨(전·닌텐도 사장) 의 증조부에 해당하는 야마우치 후사지로우씨가 , 쿄토시 시모교구 에서 「닌텐도 카드」를 창립 , 화투의 제조를 시작

1902 ◆일본 최초의 트럼프 제조에 착수.

1927 ◆야마우치 히로시씨(후의 닌텐도 사장) 가 태어난다.

1933 ◆「합명회사 산내 닌텐도」를 설립.

1947 ◆「주식회사환복」을 설립. 카드 , 트럼프류의 판매 개시.

1949 ◆야마우치 히로시씨가 사장으로 취임. 당시는 와세다 대학 법학부의 학생이었다.

1950 ◆합명회사 산내 닌텐도에서 , 대통령 화투의 제조업무를 계승.

1951 ◆「주식회사환복」의 상호를 「닌텐도 카드 주식회사」로 변경.

1952 ◆쿄토시 히가시야마구에 본사 공장을 건설 , 쿄토시내의 제조 공장을 통합.

1953 ◆국내에서 처음으로 플라스틱제 트럼프 제조에 성공 , 양산 개시.

1959 ◆디즈니 캐릭터를 사용한 트럼프를 발매해 , 어린이용 트럼프 분야를 개척.

1962 ◆주식을 오사카 증권거래소 시장 제2부 , 및 쿄토 증권거래소에 상장.

1963 ◆회사명을 현재의 「닌텐도 주식회사」로 변경.

1965 ◆요코이 군페이씨 , 닌텐도 입사. 요코이씨는 후에 게임&와치나 게임 보이의 개발한다

1969 ◆게임 부문을 확충 강화해 , 쿄토부 우지시에 우지 공장을 건설.

1970 ◆오사카 증권거래소 시장 제일부 종목으로 지정.
    ◆광전자 공학 응용의 광선총 시리즈의 판매를 개시.

1977 ◆미야모토 시게루씨 , 닌텐도 입사. 미야모토씨는 마리오 젤다 동키콩등 닌텐도의 간판 캐릭터를 제작
    ◆닌텐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텔레비젼 게임15을 미츠비시 전기와 공동 개발 , 발매 개시.

1980 ◆게임&와치 발매(4월28일). 요코이씨가 신간선을 타고 있을 때 샐러리맨이 계산기를 만지고 있는 것을 보고 발상했다고 한다
    ◆미국 뉴욕주에 현지 법인Nintendo of America Inc.(NOA) 을 설립.

1981 ◆아케이드 게임 동키콩 발매. 덧붙여서 , 다음 해에 발매된 멀티스크린의 게임&와치 동키콩에서는 처음으로 십자 키를 채용했다.
    ◆NOA, 워싱턴주 시애틀 교외에 본사를 이전.

1983 ◆생산 능력 확충을 위해 우지시에 신공장을 건설.
    ◆주식을 도쿄 증권거래소 시장 제일부에 상장.
    ◆가정용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 발매(7월15일).
    ◇세가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SG-1000」발매(7월14일).

1985 ◆패밀리 컴퓨터의 미국 발매
    ◆패밀리 컴퓨터용 소프트 슈퍼 마리오 브라더즈 발매(9월13일). 그해 패밀리 컴퓨터는374만대 다음 해에는 383만대 판매
    ◇「세가 마크 3」세가 발매(10월20일).

1986 ◆패밀리 컴퓨터 디스크 시스템발매(2월21일). 젤다의 전설과 동시 발매해 ,발매 초년도에는224만대를 매상.

1988 ◆패밀리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 서비스 개시. 다양한 서비스를 실시, 노무라 증권과 공동으로 증권 정보 및 증권거래의 네트워크 서비스를 실시한 패밀리 컴퓨터 트레이드 실시
    ◆미국에 있어서의NES의 비약적인 수요증등 에 대응하기 위해 우지 공장 증축·우지 오구라 공장 신설·본사 개발동 신설·본사 공장 정비 공사를 완료.
    ◇「메가 드라이브」세가 발매(10월29일).

1989 ◆휴대용 게임기 게임 보이 발매(4월21일).

1990 ◆ 패밀리 컴퓨터의 후속 기종 슈퍼 패미컴 발매(11월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닌텐도 유럽을 설립 , 본격적인 유럽 시장에서의 사업 전개를 개시.
    ◇「네오 지오」SNK 발매(7월1일).
    ◇「게임 기어」세가 발매(10월6일).

1991 ◆「닌텐도 엔터테인먼트」라고 하는 통일 점포로 프랜차이즈 사업의 전국 전개를 개시.
    ◆소프트웨어를 평가 , 그 정보를 패밀리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업자에 제공하는 슈퍼 마리오 클럽 발족

1993 ◆패밀리 컴퓨터의 본체 디자인을 일신 한 뉴 패밀리 컴퓨터 발매(12월1일).
    ◆프랑스 , 영국 , 네델란드 , 벨기에 , 스페인 , 오스트레일리아의 6개국에 현지 법인을 설립.

1994 ◆게임 보이용 소프트를 슈퍼 패미컴을 통해서 텔레비젼 화면에서 즐길수 있는 슈퍼게임 보이 발매(6월14일).
    ◆닌텐도 우지 공장 이 국제 품질 보증 규격 「ISO9002」의 인증 취득.
    ◇「3DO리얼」마츠시타 전기발매(3월20일).
    ◇「세가 새턴」세가발매(11월22일).
    ◇「플레이 스테이션」SCE발매(12월3일).

1995 ◆슈퍼 패미컴 전용의 위성방송 수신 어댑터 사테라뷰로, 세계 최초의 위성 데이터 방송 슈퍼 패미컴 아워의 방송 개시(4월23일).
    ◆듀얼 디스플레이 시스템에 의해 , 텔레비젼 화면에서는 불가능한 완전 입체 공간을 표현할 수 있는 버추얼 보이 발매(7월21일).

1996 ◆게임 보이용 소프트 포켓 몬스터 적/녹 발매(2월27일).
    ◆64비트CPU를 탑재한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닌텐도 64 발매(6/23).

1997 ◆TV 애니메이션 포켓 몬스터 방영 개시(4월1일).
    ◆로손에서 닌텐도 소프트를 다운 받을수 있는 닌텐도 파워 개시(11월1일).

1998 ◆슈퍼 패미콘의 본체 디자인이 변경된 슈퍼 패미콘 주니어 발매(3월27일).
    ◆반사형TFT칼라 액정을 채용한 게임 보이 칼라 발매(10월21일).
    ◆가정용 게임기로서는 세계 최초가 되는 , 음성인식 시스템을 활용한 대화 게임 피카츄 건강해요를 발매(12월12일).
    ◆극장판 포켓 몬스터 일본 개봉. 포켓몬의 해외 전개를 개시.
    ◇ 네오 지오 포켓 SNK 발매(10월28일).
    ◇「드림 캐스트」세가 발매(11월27일).

1999 ◆닌텐도와 마츠시타 전기가 , 차세대 게임기를 주체로 제휴, 닌텐도 64의 후속 기종 코드 명 : 돌핀 발표(5/12).
    ◆닌텐도 64용 주변기기 64DD를 사용한 회원제 네트워크 서비스 랜드 넷의 운영을 위해 랜드 넷DD 설립(6월30일).
    ◇ 원더 스완 반다이 발매(3월4일).

2000 ◆HAL연구소 이와타 사토시씨 닌텐도의 이사 경영 기획실장으로 취임.
    ◆쿄토시 미나미구에 새 본사 건설 , 본사 이전.
    ◇플레이 스테이션2 SCE 발매(3월4일).
    ◇원더 스완 칼라 반다이 발매(12월9일).

2001 ◆게임 보이의 후속 기종 게임 보이 어드밴스 발매(3월21일). 동시 발매 소프트는 닌텐도 하드 사상 최대 25종류, 덧붙여 역대 닌텐도 하드 중 가장 동시 발매 소프트의 수가 적은 것은 슈퍼 패미콘(2타이틀).
    ◆닌텐도 64의 후계기 닌텐드게임큐브 발매(9월14일).
    ◆파나소닉에서 ,DVD/게임 큐브 파나소닉Q 발매(12월14일).

2002 ◆세가·남코·닌텐도 3회사의 아케이드 기판 트라이 포스의 공동 개발로 제휴(2월18일).
    ◆스퀘어 ,6년만에 닌텐도 하드에로 소프트 공급을 발표(3월9일).
    ◆닌텐도 대표이사 사장으로 이와타 사토시씨가 취임. 52년만의 닌텐도 사장 교대 (5월31일).
    ◆로손에서의 닌텐도 파워 서비스종료(8월31일).
    ◇「Xbox」<마이크로소프트>발매(2월22일).

2003 ◆게임 보이 어드밴스의 고급 모델 게임 보이 어드밴스 SP발매(2월14일).
    ◆반다이 , 게임 보이 어드밴스로 소프트 공급을 발표. 자사의휴대 게임기 원더 스완은 수주 생산 방식으로 이행(2월18일).
    ◆탄생 20주년으로 , 패밀리 컴퓨터의 생산이 종료(9월25일).
    ◆인터넷을 이용한 회원 등록 서비스 클럽 닌텐도 개시(10월30일).
    ◆중국 시장에 신유기 판매 개시.게임기 메이커로서 처음으로 정식으로 중국 진출

2004 ◆패밀리 컴퓨터의 명작 소프트를 게임 보이 어드밴스 전용으로 이식한 패밀리 컴퓨터 미니 발매(2월14일). 후에 시리즈화 되었다.
    ◆ 듀얼 스크린 , 터치 스크린 , 음성인식 기능등을 탑재한 휴대 게임기 닌텐도 DS 발매(12월2일).
    ◇ 플레이 스테이션 포터블 SCE 발매(12월12일).

2005 ◆닌텐도 DS 게임 보이 어드밴스SP로 음악이나 동영상을 즐길 수 있는 , 휴대용 AV 플레 이어 플레이얀을 발매(2월21일).
    ◆게임큐브의 후계기 코드명 레볼루션 발표 (5월 18일)
    ◆게임 보이 미크로 발매(9월13일). PLAY-YAN micro 도 동시 발매.
    ◆비밀에 싸여있던 코드명 레볼루션의 패드 공개(9월 16일)

2006 ◆닌텐도 DS의 경량화 모델 Nintendo DS Lite 발표(1월 26일)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dreamwiz.com )의 NGC > 게임 게시판 > 정보 게시판링크의대모험 님의 글
:
한국 게임기 회사들, 쉐어공략 성공할까

2006년 상반기에 일본에 진출할 한국 휴대용 게임기기에 관한 일본기사와 일본인 덧글에 관한 반응입니다. PSP에 관련짓는 분위기가 많아서 PSP에 남깁니다. 다른 게시판에는 안남기겠습니다.

출처는 Gpara.com의 14일자 기사내용과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 입니다.

---------gpara.com(일본) 기사----------------
2006년 한국산 휴대용 게임기의 도전이 시작된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아성을 넘는 것을 목표로 한국산 휴대용 게임기의 도전이 내년을 기점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Reign Com, GAMEPARK, Cenix digicom 은 2006년에 휴대용 게임기 사업을 본격화 할 자세를 보여 관련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은 2001년 12월에 한국 기업으로선 첫휴대용 게임기인를 발매하고 나서 약 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산 휴대용 게임기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휴대용 게임기의 시장은 닌텐도와 소니 등, 일본 제품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이 게임 강국이라는 점과,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 약한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향후 일본 제품과의 격렬한 경쟁이 예상된다.
일본 제품에 대항하는 한국산 휴대용 게임기의 주된 제품은 휴대 인터넷및 DMB(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과 같은 첨단IT기술이 탑재되어 있다.
단순한 게임기에 머물지 않고, 한국내 에서도 처음으로 상용화 되는 인터넷 서비스 및 DMB을 활용한,기술적인 우위에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덧붙인 휴대형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기로서 승부를 할 예정으로 단순하게 플랫폼의 고급화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의 실패를 반성하여, 컨텐츠 확보에도 힘을 쓸 예정. 당시 이 경쟁 제품에 비해 뛰어난 플랫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타이틀과 인지도 부족에 의해 고전을 면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해 컨텐츠 확보에도 열의를 나타내고 있다.
(중략)
ETRI의 차세대 휴대용게임 플랫폼 개발의 타당성 및 전략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내 휴대용 게임기 판매 대수는 2006년에 200만대, 2009년 에는 약400만대가 판매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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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관한 덧글들 입니다.

에뮬레이터가 달린다던, 소문의 그녀석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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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일본을 쫓아 올 생각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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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일본 뒤쫓기 정책이군.
가끔은 독자적인 산업을 발전시켜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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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와 DS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사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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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은 중국제
내용은 일본제
이름은 한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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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이 우수하다고 꼭 팔리는건 아니야.
일본에도 실폐한 예는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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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휴대전화와 디지탈 카메라 기능 탑재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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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게임 강국이라는 점과,
>>>>>카트 라이더(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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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게임시장에 자랑할 수 있는 강점이라곤,
게임중의 사망률 뿐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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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는 한국제 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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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는 시나제야.
잘 팔리고는 있지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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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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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느나라 제품인가에는 구애받지 않아.
한국의 게임기에서만 플레이 할 수 있는 괜찮은 소프트가 나오면
사도 좋겠지. 어쨌건 팔릴지 어떨지는 소프트 나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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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서 휴대용 게임같은건 그다지 메리트가 없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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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시장에까지 진출인가, 이것은 상당한 위협이다.
아마도 폴리-스테이션2 정도의 품질 이겠지
( 주: 폴리 스테이션 - 중국의 짝퉁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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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게임시장이 붕괴된 한국은 무엇을 발매해도 헛수고야.
우선 한국은 불법 복사와 저작권을 무시하는 국민성부터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돼.
그 전엔 간단하게 복사 할 수 있는 컨텐츠로 승부하는건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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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게임과 만화는 무얼 어떻게 해도 일본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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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일본에는 들어오지도 않을거야.
중진국 등에서 적당히 팔다가 아무런 화제도 안된 채 끝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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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나 휴대폰, TV등을 붙여서 결국 쓰레기가 되지 않을까.
휴대용 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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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온라인 게임시장도 묘하게 가고 있어.
온라인 게임 대량생산 --> 유저 확산 --> 월 정액제 실시 --> 유저들 빠져나감 --> 온라인 서비스 폐지
제대로 되고 있는 게임은 라그나로크랑 리니지2 정도일까?

re : 라그나로크가 제대로 된 게임 이라구?

re : 아, 미안. 제대로 돈을 벌 수 있는 게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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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로는 역시 MMO가 좋을것 같은데.
IT인프라에 관해선 선진국 이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뭐, 일본에는 팔리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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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외국제 게임기나 게임은 일본에 수입되고 있어.
물론 게임상에서 번역이 안되니까 일부 마니아 밖에는 안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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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게임 강국이다.
일본의 패배야.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은 사망자가 안나오잖아.
사망자가 나오지 않으면 게임강국 이랄 수 없지. 굉장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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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대수가 적은 기기에 소프트를 공급하는 메이커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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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게임 강국이라며 스스로 치유하고 있군.

re : 한국은 넷 게임은 강해요.
왜 강하냐 하면, 한국에서는 패키지 게임을 발매해도
곧바로 해적품이 나돌기 때문에 전혀 팔리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넷 게임 밖에 길이 없다고..
한국의 게임회사 사장이 말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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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들을 전혀 읽지 않고 글을 쓴다.
닌텐도. 소니.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거의 100퍼센트의 쉐어를
차지하고 있는 시장에서 한국산이 어느정도 쉐어를 빼앗을 수
있을지 볼만하겠어. 이것은 감정을 빼고, 솔직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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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gpara.com



p.s.: 전세계에 일본이라는 나라에 게임기 "쉐어"를 수출할려는 나라는"미국" "대한민국" 밖에 없다는 것을 좀 알아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 일본사람들의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반응이 꽤 많았습니다. GP32후속기종이 성공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dreamwiz.com )의 PSP > 게임 게시판 > 정보 게시판진실되게살자님의 글
:
1차 출처 : 루리웹 읽을거리란의 컬럼부분 이돌컴님이 작성하신글( http://ruliweb.com )
2차 출처 : stonepc님의 블로그( http://stonepc.egloos.com/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토피아를 통해 발매된 불법 복제 게임(사진출처: http://cronos.egloos.com). >

불법복제 문화를 선도한 회사들

  한국에서 게임을 포함한 각종 컴퓨터 프로그램의 저작권을 법으로 인정하고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주1)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1987년부터였다. 그러나, 1995년 (주2)WTO 출범에 따라 강도 높은 소프트웨어 저작권 준수 압력이 있기까지 한국은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지적재산권 보호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는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여러 군소 업체들이 앞다투어 일본의 소프트를 불법 복제해서 이윤을 챙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기업 두 곳이 바로 “재미나”와 “아프로만” 이라는 회사다.

  두 회사 모두 세운상가를 거점으로 하여 출발하였으며 처음에는 MSX의 주변기기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일본 게임의 카피를 시작한 것이 1986년경의 일이었다. 카피 대상은 주로 일본의 MSX용 소프트웨어 들이었고 코나미의 (주3)[그라디우스] 시리즈나 (주4)[몽대륙], [마성전설], 같은 게임들이 카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코나미의 [그라디우스]는 MSX 최초의 메가 롬팩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개중에는 게임 소스를 카피할 때 코나미의 로고를 빼 버리고 자사의 로고를 집어넣는 일까지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그라디우스 1]이 메가 롬팩으로서 많은 호응을 얻은 데 힘입어 [몽대륙], (주5)[엘기자의 봉인] 같은 명작 게임들이 메가 롬으로 줄줄이 출시되기 시작 한다. 앞서 재미를 보았던 두 회사는 이들 게임 역시 나오는 족족 불법 복제해서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작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국가라는 것이 당시의 한국이 처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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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나미 대신 재미나의 로고가…. >

이런 현상은 비단 MSX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중소기업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주6)선경 그룹도 토피아라는 상표를 가지고 이런 복제 시장에 참여하여 애플과 MSX 양대 시장에서 적지 않은 이윤을 남겼던 것이다.

  당시 MSX 전문 잡지에 실린 광고에는 “그라디우스, 몽대륙 등의 정품 게임은 재미나만 취급합니다” 라는 카피가 당당히 실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나는 13살로 중학교 1학년생이었다. 메가 롬팩을 꽂고 MSX를 켰을 때 나오는 로고가 재미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재미나에서 일본과 계약을 해서 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들이 파는 롬팩은 마치 정품처럼 인증 마크도 들어 있었고 케이스도 그럴싸하게 디자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임을 구하기 위해 자주 가던 세운상가의 재미나 대리점이 단골이 되어서 주말마다 놀러 가곤 하던 시절.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의 대리점 과장이 대리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된다. 이번에 일본에서 신종 게임이 나오는데 차질 없이 물건을 제 날짜에 사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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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나미의 1메가 게임 [몽대륙] 유저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만큼 우선 복제 대상으로…. >

아직 어려서 잘 몰랐지만 계약을 하게 되면 원래 개발사에서 협조를 해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사온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곳의 과장이란 사람이 이야기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어떤 게임도 직접 계약하고 하는 게 아니며 모든 게임을 일본의 아키하바라에서 돈 주고 사와서는 그대로 롬 카피를 해서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원래 만든 사람들에게 잘못하는 거잖아요” 라고 질문을 했다. 그 나이에, 나 보다 최소한 20년은 나이가 더 많은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질문한 것은 확실히 당돌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다음에 과장에게서 날아온 답변은 더욱 당돌한 것이었다.

  “어차피 쪽발이들 건데 뭐 어때? 애국하는 거잖아?”

  왜색에 대한 경시 풍조가 무척이나 심했던 때. 일본어를 입에만 올려도 마치 매국노처럼 경멸당하기 일쑤였고 일본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장의 그런 발언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나 역시 더 이상 재미나의 롬팩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복사해서 파는 것 나도 학원에서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테이프로 카피해야지- 이른바 정품 소프트웨어에 대한 (주7)모럴 해저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국내 유통업자들의 무책임한 유통 행태가 유년기에 있던 당시 게임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산업 전반에 걸쳐 어떤 부작용을 낳게 될 것인지 아무도 생각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일본의 게임 회사에서 일하던 도중 개발자들과 술 마시며 어울리는 기회가 있었는데, 주로 아케이드 게임을 전문으로 만들어 온 개발자 한 명이 갑자기 한국 시장에서 표절과 불법 복제하는 사례가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솔직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던 생각이 난다. 당연히 한국 사람이니까 펄쩍 뛰어야 할까? 아니면 그런 일 없었다는 듯이 시침 뚝 뗄까……?

  그런데, 그 사람이 이어서 한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옛날에 아케이드 게임을 개발할 때 서울에 다녀온 선배가 재미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하며 나에게 보여주더군요. 그건 MSX용의 [그라디우스] 롬팩이었죠. 그걸 보고 코나미가 한국에 라이센스 판매를 하나 잠시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코나미는 아직 해외에 진출하기 전이었거든요”

  솔직히, 얼굴이 벌개져서 그 자리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취한 느낌도 온데간데 없이 다 날아가 버리고 고개가 팍 숙여지는 느낌이 났다.

  물론 그 이야기를 오래 했던 건 아니다. 내가 당황해 하니까 바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서 계속 술을 마시긴 했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편치 않았던 것이다.


일본 게임의 불법 복제가 국산 게임 개발에 미친 영향

애국심을 생각해서 일본 게임은 복제하되 국산게임은 돈 주고 사주자는 이야기. 그 시대를 지배한 사상이기도 했지만, 반면 지금도 여기저기 불법 복제하는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사용하는 명분이기도 하다. SCEK, MS 등이 한글화한 게임이나 국내 개발 게임은 돈 주고 사야 하지만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는 게임은 카피해서 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풍조. 과연 그럴까?

  1980년대에도 직접 게임을 개발하려 애쓰던 사람들이 존재했다. 마치 1979년에 구멍가게 허드슨을 이용해 유저들에게 자기가 만든 게임을 공급하고 싶어 했던 개발자들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국산 게임 개발, 특히 MSX로의 국내 게임 개발 시도는 1987년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주8)[형제의 모험], [용의 전설], (주9)[수퍼 보이] 등을 개발한 재미나의 개발실장 김을석씨를 필두로 (주10)[대마성] 및 [더블 드래곤]을 개발한 토피아의 이규환씨, [뉴 버블버블]이라는 게임을 개발한 정찬용씨 등. 이 외에도 수많은 개발자들이 직접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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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그램의 창립 멤버가 만든 국산게임 [대마성]. >

이런 게임들은 SKC, 아프로만 등에서 주최한 소프트웨어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대기업의 관심을 끌었고 실제, 대우전자 등의 대기업이 자금 지원을 하는 가운데 추가로 제작이 이루어지고 일부는 판매용 MSX에 번들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반 매장에 놓인 패키지에 대한 유저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5,000원이면 복사해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일본 게임과 비교해 아직은 엉성하기만 한 국산 게임을 20,000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사기에는 애국심만 가지고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게임 시장이라는 것도 하나의 시장이고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충족시켜야 팔리는데 막상, 싸게 복제해서 즐길 수 있는 일본 게임을 제쳐두고 일본 게임과 비교해 엉성해 보이는 국산 게임을 돈 주고 사는 유저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라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도덕적으로 용서되었던 이런 풍조가 결국 국산 게임의 개발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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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전자에서 HOT&#12539;B사로부터 정식 라이선스를 받아 출시한 [페어리 랜드 스토리].
(사진출처: http://blog.dreamwiz.com/hanhogyu). >


불법 복제에서 불법 표절로

불법으로 복제된 게임이 시장의 주류를 차지하던 1980년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대우전자 및, 다우정보 같은 기업을 중심으로 정식 라이센스 된 MSX 게임의 공급이 추진 된다. 불법 복제 된 일본 게임들이 계속해서 시장에 만연하게 되자, 정부 관계자들도 더 이상 방관만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고, 플랫폼 사업자에 속하는 대우전자 및 삼성전자 등에 국산 게임 개발을 장려하는 정책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실정에는 MSX로 공급 된 왜색 게임들에 대한 학부모 관련단체 등의 우려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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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국산 게임 개발을 둘러싼 역학관계. >

여기에는 한국에서 MSX 시장을 리드하는 역할인 대우전자도 적극적으로 라이선스 사업에 참여했다. [페어리 랜드 스토리]나 [자낙], [알레스트] 같은 게임이 한글 매뉴얼을 동봉한 패키지로 출시가 되었고, 다우정보 같은 곳에서는 코나미와 손잡고 [사각의 비밀] 등을 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퍼질 대로 퍼져버린 불법 복제의 모럴 해저드를 뒤늦게 기업 몇 개가 나서서 바로 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일반 매장에 놓인 이들 게임은 30,000원을 넘나드는 비싼 가격에 유저들의 조롱을 받으며 잊혀져 갔다.

  또한, 오리지널을 지향하며 개발의욕을 불태우던 개발자들도 시장성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자 고질적인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고 급기야 가장 빠르게 게임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인 표절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국을 낳게 된다. 여기서 잠시 마이컴 1990년 8월호에 실렸던 재미나의 개발실장 김을석씨의 인터뷰를 살펴 보자.

- 지금까지 몇 종류의 게임을 개발했나요?

  [수퍼 보이] 시리즈를 비롯해서 7종류를 개발했어요.

 - 아이디어 및 개발기간, 제작비는?

  게임을 만들 때 제일 중요하고도 골치 아픈 게 바로 아이디어죠. 저 같은 경우는 주로 다른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고 2명이 개발할 경우 한 게임당 약 3개월 정도씩 걸려요. 그리고, 제작비는 약 3~400만 원 정도구요.

 - 게임을 개발함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리고, 아무런 기계도 사용하지 않고 게임을 개발하는지에 대해서도.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기술상으로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교해 커다란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러한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과 시나리오 부재가 문제지요. 그리고 게임을 개발할 때는……

 인터뷰 당시는 MSX가 점차 쇠퇴하고 게임기 시장이 떠오르는 때였기 때문에 이후의 전문에는 게임기 게임의 개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까지의 내용을 보면 당시 개발자들도 아이디어와 창작력이 핵심 경쟁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탭이 필요한데 시장성이 없어서 이것을 구성하기 어렵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법 복제 때문에 시장성이 확보되지 않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해도, 환경 탓만 하며 게임을 만들다 보면 종래에는 만드는 사람의 마인드마저 변하게 된다. 비록 처음은 모방작에서 출발했더라도 모방작을 거쳐 순수 창작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었던 판타그램, 미리내 소프트, 소프트액션 등과 달리 재미나와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불법 복제가 기업의 모토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단순표절작만 줄줄이 내어 놓다가 도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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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작인 형제의 모험에 비해 노골적으로 [수퍼 마리오]를 표절한 [수퍼 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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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퍼 보이 3]에 이르러 액션성도 거의 비슷하게 다가갔지만……. >


주1: 컴퓨터프로그램 저작물의 저작권을 보호하고 공정한 이용을 도모하여 관련산업과 기술을 진흥시킴으로써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1986. 12. 31, 법률 제3920호)

주2: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를 대신하여 세계무역질서를 세우고 UR(Uruguay Round of Multinational Trade Negotiation: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는 국제기구

주3: 코나미가 1985년에 게임센터용으로 내놓은 게임. 강제 횡스크롤 슈팅으로 독자적인 시나리오를 갖추고 파워업 캡슐을 취득해서 무기를 업그레이드시켜 가는 등 슈팅 게임의 일대 혁명을 일으켰던 게임이다. MSX로는 1986년에 이식되었으며 패미컴판과 달리 MSX만의 독자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리즈가 이어지게 된다.

주4: 코나미에서 1986년 발매한 1메가 게임. 펭귄이 여자친구 펭귄의 치료약을 구하러 떠난다는 시나리오를 가진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 많은 유저들에게 사랑 받았다.

주5: 1988년 발매된 1메가 퍼즐 액션 게임. 전작인 [왕가의 계곡]을 더욱 파워업 시켜 MSX1용과 MSX2용으로 나누어 발매되었다. 에디터 기능을 이용한 유저 콘테스트를 개최, 당선작 들만 모아 따로 타이틀을 내는 일도 있었다고.

주6: 1953년 선경직물로 출발한 회사. 1976년 선경(주)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종합상사로 지정받았고, 건설목재금속기계화학관광호텔업산림농산조경공사 등에 진출하였다. 게임산업에 있어서는 산하의 SKC㈜가 토피아라는 자회사를 이용해 5.25인치 디스크 및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한 복제 소프트 유통 부문에 진출하였다. 1980년대에는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함으로써 석유정제 및 석유화학산업 부문에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하였으며, 이어 정보통신산업에 진출하여 1989년 미국에 현지법인인 유크로닉스(YUKRONICS)를 설립하였고,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현재 SK텔레콤)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현재는 SK 그룹으로 총칭된다.

주7: 원래 보험시장에서 사용됐던 용어로 도덕적 해이를 뜻한다.

주8: 1987년. 재미나의 개발실장 김을석씨가 MSX용으로 만든 최초의 국산게임.

주9: 재미나의 개발실장 김을석씨가 개발한 국산게임 [수퍼 보이] 시리즈의 첫째 타이틀로 1989년에 MSX용으로 발매되었다.

주10: 재미나에 이어 토피아가 1988년에 내놓은 국산 액션 게임. 타이토의 [버블보블]과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재미나의 라인업이 대부분 심각한 표절작이었던 것에 반해 이쪽은 창작적인 면이 돋보이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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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NINTENDO, 任天堂

Game 2006. 1. 29. 14:30 |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시작 -
TV 모니터, 게임기, 콘트롤러,
지금까지의 게임기는 이 3가지가 하나의 세트였다.
그러나 지금, 그 고정 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닌텐도는 그것을 이루어 낸다.


- 야마우치 히로시 -



- 닌텐도란 무엇인가 -

쿄토의 한 구석, 작은 화투가게.
닌텐도의 역사는, 일본의 쿄토에서 시작된다.
무로마치 시대 쇼고인 저택 앞에 있던 주택을, 메이지에 사는 한사람의 직공이 매입해, 가게를 연다.


- 메이지의 고도, 화투 공예가 -

닌텐도의 창업은 1889년(메이지 22년) 9월 23일.
유명한 공예가 였던 야마우치 방지로씨(야마우치 히로시의 증조부)가, 쿄토시 분쿄구 오오하시 니시이리 에서 「닌텐도 카드」를 창립, 화투의 제조, 판매를 개시했던 것이 그 역사의 시작이다.

그의 화투는 쿄토와 오사카에서 판매되어 주변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화투가 어느 덧 도박장에서 사용되게 되면서, 그와 함께 사업도 커진다. 「대통령표」의 화투가 가지는 아름다운 색감은 당대의 고상한 미의식에 들어맞았고, 프로 도박사는, 승부의 기로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닌텐도 카드의 화투 수익은 자꾸 자꾸 성장해 갔다.

그러나 방지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 전개를 한다. 1907년(메이지 40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트럼프의 제조를 단행한다. 그와 동시에, 판매 시장의 확대화를 모색한다. 거기서 점 찍어 두었던 것이, 당시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지고 있던 국영 기업 「일본 전매 공사」(담배 산업)였다. 일본 전매 공사와 교섭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결국 닌텐도 카드의 화투는 담배 유통망을 타 전국에서 판매되게 된다.

그리고 어느덧 「대통령표 화투」는 전국적인 브랜드로 성장해, 화투를 대중의 사이에도 넓게 침투 시킴으로써 번성하게 되었다. 닌텐도 카드는 방지로씨가 명이 다할 무렵에는 일본 최대의 카드 회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닌텐도, NINTENDO, 任天堂」회사명의 유래

방지로가 붙인 「닌텐도」라고 하는 회사명은, 오늘날에 와서는 정확한 유래를 알수가 없다. 열심히 노력하고, 마지막에는 그 성공 여부를 하늘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의미일까. 중국의 고사성어, 인사를 다해 천명을 기다린다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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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텐도의 회사 로고 >




현재의 닌텐도의 회사명 유래에는 인생은 한치 앞이 어둠, 운은 하늘에 맡겨, 주어진 일에 전력으로 임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야마우치 히로시 탄생 -

2대째 츠미라.

방지로에게는 후계자가 되는 아들이 없었다. 그 때문애 딸의 데릴사위로서 근면 성실하고 정직한 청년 카네다 츠미라를 맞이해 후계자로 정하게 된다.

1929년, 야마우치 츠미라가 닌텐도 카드의 2 대째 사장에 취임한다. 그는, 가업과 달리 부동산업 에도 뛰어들어, 쿄토의 히가시야마 지구의 토지를 입수해 나간다.


- 염원의 사내 아이 탄생 -야마우치 히로시-

츠미라와 아내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선대와 같이, 딸뿐이었기 때문에, 장녀의 데릴사위인 이나바록지 승을 맞아들였다.

1927년, 승과 아내와의 사이에 사내 아이가 태어난다. (엽기적인것 같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는 흔히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ㅡㅡ;)

닌텐도 창업이래 처음 태어난 남자 아이는, 히로시 라고 이름지어졌다.

히로시가 5살때, 3대째 뒤를 이을 것이었던 아버지, 승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히로시는 모친으로부터도 떼어져 조부모인 원에게서 자란다. 히로시에게 할머니는, 뭐든지 좋아하는 대로 시켜 주었다. 관습에 따라서 엄한 교육도 받았지만, 후계자로서 자유롭게 자랐다.

히로시의 성격은 건방지고 도전적이 였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로, 호기심 왕성한 아이로 자라게 된다.

1940년, 히로시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전쟁이 시작된다. 그는 학도 동원에 의해 군수 공장에서 일했다. 1945년, 패전과 함께, 히로시는 아무도 모르게 놀러 가고 싶었다 라는 이유로 쿄토를 떠나 토쿄의 와세다 대학에. 조부가 히로시를 위해서 구입한 시부야의 쇼우토우(고급 주택가)의 대저택으로 옮겨서 살게된다.

대학 생활은,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매일 같이 즐기고 향락적인 생활이였다. 당구에 열중해, 한달에 몇차례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이나 술을 마셨다. 쿄토의 부자 사장의 아들로서 화류계에서도 유명한 그는, 사치와 위세의 즐거운 자유분방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전환기가 찾아온다. 조부 츠미라가 병에 쓰러지고 위독, 임종하게된다. 그는 급히 쿄토에 돌아와, 삼대째 사장으로서 가업을 잇게 된다. 그 당시는 그가 21세가 약간 지났을때의 일이다 .


-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야마우치 사장 취임-

조부의 위독으로, 야마우치가 삼대째 최초의 사내 아이인 야마우치 히로시는 급히 쿄토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임종한 조부 의뒤를 이어서 가업을 잇게 된다.


- 22세의 부자 사장 -

후계자를 유언 하는 병상의 츠미라에게, 야마우치 히로시는 닌텐도에서 일하는 야마우치가의 사람은 자신 이외엔 필요없다라고 말해, 조부는 조건을 수용해서, 회사에 있던 야마우치가의 사촌형제들을 회사로부터 퇴사 시키게된다. 1949년, 조부 츠미라의 타계에 의해, 손자인 야마우치 히로시가(와세다 대학 중퇴) 22세의 젊음나이로 사장에 취임한다.

닌텐도 카드는 작으면서 훌륭한 전국 브랜드이다.
사내에서는 이런 부자로 괜찮은가라고 히로시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로 고위 사원 100명 이상의 비난에 부딛치게 된다. 야마우치는 그런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천성적 결단과 속도, 낙관 주의로 위기를 극복해, 젊은데 꽤 하잖아 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1951년, 야마우치는 회사명을 「닌텐도 카드」로 변경해, 다카마쓰 마치에 본사를 옮기게 된다. 생산 기능을 그곳에 집중 시키고 현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히트 상품을 낳는다.

1953년,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트럼프의 소재에 플라스틱을 채용, 제작에 성공했던 것이다. 플라스틱 트럼프는 고급적인 이미지로 알려지면서, 대히트를 하게 된다. 오늘날에서야 트럼프는 플라스틱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정말로 혁신적인 상품이었다.

1959년에는 판권 획득이 힘들던 디즈니 와의 교섭을 성공 시키면서, 디즈니 트럼프를 발매, 어린이용 트럼프라고 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공전의 대히트를 하게된다. TV에 다량의 선전을 했던것도 대 히트를 기록하게된 원인이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플레이 가이드를 동봉, 이것 역시 생각지도 못하게 호평을 얻으며, 매상에도 크게 공헌 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하드웨어에 소프트 메뉴얼을 첨부해서 파는 방법을 알게되고, 그 중요성을 알게 된다.

이전의 1956년에, 야마우치는 미국에 시찰을 가게된다. 세계 최대의 트럼프 메이커인 US 프레잉 카드사의 시찰이 주된 목적이었다. 어떤 거대한 회사가 등장할까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던 청년 사장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단순하게 작은 중소기업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히로시는, 카드를 직업으로 하는 한, 세계 제일이 되어도 이런 것인가라는 큰 쇼크를 받게된다.

1962년, 야마우치는 닌텐도를 주식 오사카 증권 거래 시장 제2부에 상장. 주가도 900엔 전후까지 상승 해 나가게된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지방의 유력 기업으로 상장되어 주주를 위해서 라도 가업인 카드 회사로부터 벗어나 성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 다른 사업으로 진출 하는 닌텐도, 탈카드 노선 -

카드 사업의 규모가 생각보다 작았다는 것을 보았던 젊은 경영자, 야마우치는, 새로운 비지니스에 차례차례 진출 하게된다.


- 시행 착오의 시대 -

그 당시 부터 야마우치는, 탈카드 노선을 꾀하게된다. 러브호텔의 경영(자신 스스로도 종종 이용했다고 전해짐)이나, 택시 회사의 운영 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 하지만, 어느 것도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지금부터는 인스턴트의 시대가 된다 라고 예상, 3분식품 이라고 하는 자회사를 설립, 식품 산업에 도전한다.

뽀빠이 라면이나 디즈니 플릭커 등이 그 예. 그리고 인스턴트 밥이라는 혁신적인 즉석 밥의 개발을 시도 한다. (현재의 야끼소바 UFO와 같음, 뜨거운 물을 넣어 3분후 뜨거운 물만 버려 먹는 타입) 개발진은, 대학의 연구실에 억지로 간절하게 부탁해 어떻게든 상품화에 도달하게 된다. 완성된 제품은, 퍼져버린 죽같은 제품으로 히로시 스스로도 시식하지만, 엄청나게 이상한 맛에 낙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를 결정한다. 물론 결과는 완전히 팔리지 않고 참패, 드디어 이 길도 단념하게 된다.

설상 가상으로 1964년, 일본이 토쿄 올림픽으로 인한 호황으로 들뜨고 있을 무렵, 닌텐도의 수입을 지탱하고 있던 트럼프 시장이 포화에 이르러, 매출이 제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닌텐도의 주가는 한때 900엔에서 급락, 마침내 60엔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때 야마우치 사장은 깨닫는다.

오락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오락 상품이라는 것은, 있어도 없어도 괜찮은 것, 자고 일어나면 시장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게다가 기업으로서 노하우 축적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닌텐도는 창업 시작부터 오락 상품인 화투, 트럼프를 제작해 왔다. 비록 탈 카드라고 해도, 택시, 호텔 경영, 식품 산업에서는 무리가 있었다. 역시, 지금까지 걸어 온 오락의 세계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 길은 게다가 자금 문제도 위험하지 않고 신속하게 할 수 있다.

거기에서 닌텐도는 완구분야를 목표로 하게 된다. 

60년대 후반부터, 닌텐도는 여러가지 오락 상품을 출시 해 나간다. 젊은이들을 타겟으로한 양면 트럼프, 훌라후프 붐으로 인한 히프 플립, 보드게임에는 운명 게임, 오오하시 거천이 인기 절정일때에는 거천의 마작 교실등 여러가지 완구 상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도전해 보았지만 원래 작은 규모의 장난감 시장에 후발 주자로 나서서 전통의 메이커(토미나 반다이) 가 가지고 있는 축적된 노하우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서로 경쟁해도, 이렇다 할 이익도 나오지 않고, 사업의 이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가야할 길은 하나. 즉, 오락의 세계에서 장난감 메이커가 진출하고 있지 않은 분야. 그것이 전자공학 분야였다. 닌텐도에겐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자 공학 분야로 진출하는 닌텐도 -

전자 공학 분야로 진출한, 야마우치는 1965년부터 이공계 대졸자들의 채용을 시작 했다. 물론 초반에는 지방의 중소기업 카드의 닌텐도 에게는 이공계 학생은 와주지 않았지만, 노력의 결실이 서서히 증가해서 조금씩 전자 공학 완구가 개발되게 된다.


- 닌텐도 하드웨어의 아버지 요코이 군페이와 하이테크 완구 -

최초의 시작은, 화투의 제조 라인을 설비 보수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요코이 군페이가 있었다. 그가 심심풀이로 부서에 있던 기계로 만들고 있던 완구가 야마우치 사장의 눈에 들게되어 야마우치 사장은 닌텐도는 게임 메이커이니까, 게임으로서 상품화해라라고 지시, 1966년, 그상품이 울트라 핸드라는 이름으로 (800엔) 팔리기 시작한다.

텔레비젼 선전에 힘입어 140만개나 팔린 이 울트라 핸드는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대히트였다. 이것에 착안한 야마우치는 개발부를 신설, 요코이를 설비 보수의 일에서 개발부로 자리이동을 시켰다.

새로운 제품을 제작하라는 사장 명령에 따라 요코이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필사적으로 연구해서, 조금씩 기발한 아이디어가 덧보이는 신상품을 개발 해 나간다.

1968년, 울트라 머신(1480엔)의 개발, 상품화. 전기로 탁구공을 발사하는 소형의 기계지만 이것도 대히트를 기록하고, 자이언츠 V9의 초기 무렵의 배팅 센터의 호황에도 힘입어, 3년에 200만개의 매상을 기록할수 있었다. 또 3년 후에는 잠망경을 모델로한 울트라 스코프(2980엔)를 개발, 매출은 높은 가격으로 비록 이전의 2개의 제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인기는 있었다.

요전에도, 닌텐도의 개발부는 여러가지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일본 그랑프리 F1 인기 전성기에는, 모형 자동차를 발사하는 쇼트 레이서 를 개발, 하이칼러의 고급스러움을 매력으로 하는 살맨 트럼프를 발매, 자유 연애의 문화가 유행할 무렵에는, 연인의 손을 잡아 애정도를 재는 기계, 러브 테스터를 개발, 시대의 유행에 더불어, 그 틈새를 포착한 것과 같은 완구를 세상에 내어 놓게 된다.


- 다변화 경영에게 모색 -

그 당시 닌텐도는 다변화 경영으로의 길도 모색하고 있었다. 가정용 간이 복사기 카피 라스를 사무용 기구로 시작해, 문구 자나 노트, 학생용 교재도 제작, 훌라후프의 유행으로, 새로운 디자인의 운동기구, 유모차 등 여러가지 제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실패. 게다가 고액의 개발비를 투입하고 있던, 회사는 빚에 파묻혀서,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아슬아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 그당시의 상황을 후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회상 -

"그 당시는, 태어나 처음으로 돈에 대해 걱정을 했습니다. 상장 기업의 경영자라고 하는 체면도 있어서, 어쨌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만약 기업이 주식에 상장되어 있지 않았으면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적 부터 돈에 궁할리가 없었던 그도 그 당시에는 돈 때문에 이리저리 다녔다고 전해진다.

회사를 유지 할 수 있던 기반을 그는 화투, 트럼프라고 했다. 수수하면서도 안정된 이익을 올리는 정평 상품이 있었기 때문이 였다. 간신히 1970년대 무렵부터, 닌텐도의 기술진도 점점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기술과 아이디어가 집결한 획기적인 완구 상품이 개발되게 된다.


- 광선총의 대히트 -

1970년, 광선총, 광선총 SP 를 발매. 전대미문의 엄청난 대히트와 함께 당해의 완구 업계 탑 세일즈를 기록 하게 된다. 휴대 전등의 전구, 전지와 셔터로 소총에서 광선을 발사하며 태양전지를 수광 센서로서 이용하는 아이디어, 그리고 발사 타겟을 동봉해 가격도 5000엔 정도였다. 이 기술을 발전 시켜서 광선총 커스텀 시리즈를 발매 하게 된다. 사정거리 100미터를 자랑하는 광선총이였지만, 이 제품은 전혀 팔리지 않게 된다. 이유는 필요 이상의 고성능화(소총의 광원에 카메라 strobe를 사용)를 사용해, 가격도 25000엔(현재의 10만엔)으로 시장을 무시한 가격 설정도 큰 원인이었다.

광선총의 히트로 날개 돗힌듯 팔려나간 광선총 시리즈였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아 불량품이 속출하게 되고, 소비자로부터의 반품때문에. 팔린만큼의 큰 이익은 없었다.

하지만, 야마우치는 이 상품의 성공으로 인해 전자 공학을 활용한 상품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놀이를 제공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닌텐도가 직접 다루어야 할 상품이다 라고 하는 강한 확신을 얻게 된다.

그 당시, 닌텐도는 신사옥을 건축한다. 흰 외벽에 쓰여진 NINTENDO 라는 문자가 쿄토의 화투가게에서 세계의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탈피를 나타내고 있었다.


- 레이져 클레이사격장 -

1973년 봄, 닌텐도는 업무용 레져 시설 레이져 클레이 사격 시스템을 개발하게 된다. 광선총으로 기른 노하우를 대형 레져 시설로 발전 시켜, 볼링 붐의 유행과 더불어 시설의 포화화를 예측해, 본사 이전에 따른 대지 이용을 생각한 기획 개발이였다.

닌텐도는 이것에 회사의 운명을 걸고 임하게 된다. 성공하면 고액의 부채를 돌려줄 수 있고. 일개의 완구 메이커 이미지에서도 탈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사업을 스포츠로 정착하게 되면, 비약할수 있는 대찬스.

쿄토에 오픈한 세계 최초의 실내 클레이 사격장에는, 첫날부터 보도진과 손님이 밀어닥치고 대성황, 곧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잇달아 주문이 오게 되며 히트의 전주곡이 되었다.

닌텐도는 모든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고액의 투자를 결정, 이 레져 시설용의 자재를 준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레이져 사격장은 수개월 만에 맹렬한 기세로 성장해 나가게 된다.


- 겁없는 3인방 -

레이져 클레이 사격 시스템엔, 요코이가 중심에, 프로젝트 담당에는 그가 뽑은 카미무라 마사유키가, 그 아래에는 시즈오카 대학으로부터 입사한 타케다 현양이 배치되었다.

요코이는 훗날에 개발 인원 일부를 인솔해 게임 보이 그외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종사하게 된다. 카미무라는 훗날에 개발 인원 일부를 통솔, 하드웨어 제작에 종사하게 되며, 타케다는 후에 개발 3부의 중심이 되어, 특수 칩이나 메모리, 배터리를 만들어 가게 된다. 이후 닌텐도를 지탱해 나가는 중요한 3인방이, 이 레이져 클레이 사격의 개발에 집결하게 된 것이다.


- 예상치 못했던 오일쇼크 -

그러나 그 가을, 중동 전쟁이 발발, 오일쇼크가 일본을 습격하게 된다. 사람들의 소비 행동은 신중하게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격장에 손님이 끊기게 된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제품주문 취소가 잇따라, 외상 판매금의 회수도 안되는 상태에서, 선행 투자로 자재 확보를 하고 있던 닌텐도는 막대한 타격을 받아 다시 한번 또다시 도산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와는 규모가 다른 엄청나게 큰 부채를 안아, 빚더미의 수렁으로 빠져 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야마우치는 전자 공학의 장래성과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어른을 대상으로도 놀이 수단을 판매할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전자 공학 기술의 습득에 계속 힘을 쏟게 된다.

그리고 당시 요코이는 이 시기에 회사에 공헌하기 위해, 여러가지 상품을 출시 하고 있었다. 광선총과 16밀리 필름을 사용한 와일드 건맨, 그에 이어 실사 영상을 사용한 과녁 게임 바트르샤크와 스카이 호크를, 빛을 변조파에 태워 전송한다는 광선 전화 LT, 자동 연주기 가능한 전자 북 일렉트로닉 콩가, 왼쪽으로 밖에 돌지 않지만 저렴한 가격의 무선조종 좌익 RX, 벽에 비친 빛을 떨어뜨린다 컨셉의 duck 헌트 등등....

어느 것도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이익에는 좀처럼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닌텐도는 이 후 당분간 청색 한숨의 맵고 괴로운 시대가 계속되어 간다.


오일쇼크란~!!!!!

아랍을 중심으로 한 석유 수출국 단체가, 석유의 가격 인상과 생산 삭감을 밝혔기 때문에,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 석유에 의존하는 일본 경제에 있어 대 타격이 된 것. 주부들의 사이에는 석유 부족→물 부족→사재기하고라고 하는 심리가 발생 가격 인상을 기다려 석유를 아끼는 상인들과 함께, 슈퍼에서 비닐 종이가 없어지는 등 큰 소란이 일어난것. 그것과는 반대로 생활필수품이 아닌 오락 산업에서는 도산하는 회사가 잇따랐다.


- 빛으로 나아가는 닌텐도 : 미스터 비디오 게임-

1970년대의 닌텐도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거대한 부채를 안고 온갖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어두운 터널의 저 편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칼라 TV게임기의 개발 -

1970년대 중순, 미츠비시 전기로부터 칼라 TV 게임기를 개발해 달라는 요청이 온다. 원래 미츠비시 전기는 타사와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개발 도중 그곳이 도산하는 바람에 공중에 뜬 계획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성공을 느껴 즉석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된다. 1975년, 미츠비시 전기와 제휴해 텔레비젼 게임의 개발을 지시한다.

야마우치 사장은 가격이 비싸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처음에 판매 가격에서 원가를 산출해 내었다. 다른 회사의 제품이 2만엔 이상이었기 때문에, 1만엔을 낮추라고 지시했고, 이에 담당자(카미무라)가 미츠비시와 절충에 절충을 거듭해 최종적으로 야마우치의 주장으로 타결하게 된다. 1977년, 폰 등 간단한 비디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소프트를 내장한 칼라 TV게임 6, 칼라 TV게임 15를 발매하게 된다. 결과 그 계획은 성공. 판매량은 100만대정도도 판매되었다.

닌텐도의 성공에 힘입어 다른 회사들도 소프트 내장형태의 가정용 게임기를 발매했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가정용 TV게임기의 세계에 처음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시기의 잡다한 이야기 - 야마우치 사장 개명 -

1977년, 야마우치가 50세를 맞이했을 무렵, 그는 이름을 박에서 부로 개명하게 된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그가 사업을 하면서 우연히 전화번호부를 보니, 야마우치 히로시라고 하는 자신과 동성 동명의 사람이 너무나 많아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이것도 그의 직감에 의한 것인지 , 닌텐도는 이 시기부터 서서히 호전되기 시작한다.


- 업무용 비디오 게임에 진출 -

1978년, 타이토의 업무용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발매, 다음 해, 전 일본이 열병에 걸린듯 침략자 붐이 일어나, 남녀노소, 아이로부터 시작해 샐러리맨까지 모두가 이 게임에 열중하게 되고, 이 게임은 일본 열도를 석권 하게 된다. (일본의 게임 업계는 이것을 기폭제로서 성장해 나아간다)

야마우치는 이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보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이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야마우치는 전자공학 기술을 응용한 오락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페이스 인베이더에 있었던 것이다.

닌텐도는 가정용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늦었지만, 스페이스 피버라는 아류판을 릴리즈해 큰 수입을 얻게된다, 매출은 일단 회복하게된다. 그 스페이스 피버를 첫 출전으로 닌텐도는 업무용 비디오 게임 분야에 진출, 헬리콥터 파이어, 경찰관, 스카이 소형선 선장, 그리고 레이다 스코프등등... 닌텐도의 개발진은 차례차례로 비디오 게임을 만들어 간다.


- 미야모토 시게루와 닌텐도의 만남 : 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에 입사 -

1977년, 미야모토 시게루가 닌텐도에 입사했다. 그는 닌텐도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의 닌텐도는, 화투나 트럼프는 물론, 아케이드 게임을 만들고 있거나, 가정용의 디즈니 보드게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외에도 완구도 만들어서, 가정용의 광선총으로 노는 게임이나, 가정용의 생활필수용품인 복사기, 유모차, 문구 등, 여러가지를 만들고 있었죠. 나는 당시에 마음대로 트럼프를 살수 있었기에, 그 외에는 생활필수용품을 만드는 회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래서 닌텐도라면 생활필수용품을 기획했을때 상품으로 만들어 줄 것같은 회사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미야모토의 아버지 친구가 야마우치씨의 옛 친구 였던 것을 인연으로, 미야모토는 야마우치와 직접 면접을 하는 찬스를 얻게 된다. 그는 화첩과 큰 붓를 지참해, 유아용 행거나, 유원지용 시계, 아이가 3명 동시에 탈 수 있는 그네시소를 꺼내 설명을 했다. 그것을 본 야마우치는, 그가 가진 풍부한 독창성에 매력을 느껴서 채용하게 된다. 훗날 입사한 미야모토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런데, 입사하고 보니 트럼프는 생각이상으로 크고, 생활필수용품들의 적자가 꽤 위험한 상태였다" 라고 했었다.

당시의 그에게 맡겨진 일은, 인쇄물의 디자인, 카드의 밑글씨 제작, 게임기의 케이스의 디자인(블록 무너뜨리기는 미야모토가 손수 제작) 등이었다.


- Nintendo Of America 창립 -

1980년, 뉴욕의 맨하탄에 위치한 현지 법인 NOA -Nintendo Of America-를 창립. 대표이사 사장에, 야마우치의 사위인 아라카와가 오르게 된다.

지금까지의 닌텐도는 자사의 게임을 현지의 타회사에 라이센스 공여하는 형태로 팔고 있었기 때문에 이익이 적었다. "지금부터는 NOA가 수입해서 판매해 나가면 좋겠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서도, NOA는 설립후, 당분간 실적이 침체상태 였기 때문에, 아라카와 사장은, 샘플 테스트로 호평이었던 업무용 게임기 레이다 스코프를 대량으로 팔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의 대부분을 쏟아 넣어, 레이다 스코프 3천대를 주문 하게 된다.

그러나 레이다 스코프는, 4개월 동안의 배로 수송되는 사이에 완전히인기가 식어버려 전혀 판매되지 않고 2천대나 재고로 남아 버리게 된다. 재고 처리가 곤란해진 아라카와 사장은, 게임기 본체는 그대로 두고, ROM 내용만을 바꾸어 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본사에, 새로운 게임을 개발해 그 기반만이라도 보내달라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제일 수송이 용이한 지역인 미국의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시애틀로 NOA의 주거지를 옮겼다. (닌텐도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구단주 한마디로 시애틀 토박이)


- 미스터, 비디오 게임 -

NOA로부터 새로운 ROM 개발의 요청을 받은 닌텐도 본사. 그러나 개발진은 모두 다른 일에 쫓겨 개발부서 프로그래머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요코이의 디자이너에게 만들게 해라라는 제안에 따라, (가나자와공업 대학으로부터) 입사 4년째의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업무를 맡기게 된다.

최초의 구상은 게임&워치의 뽀빠이 게임. (동키콩 탄생~!!!) 요코이와 미야모토의 아이디어로 인해 그유명한 동키콩의 시초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개발자들에게 아저씨라고 불린 이 캐릭터, (훗날 마리오라는 캐릭터로 불리게 된...) 미야모토가 쓴 기획서의 일러스트에는 미스터 비디오 게임이라고 정해지게 된다. 후에 NOA의 사원에 의해 마리오 라고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 동키콩 -

반년 후, 완성한 게임의 타이틀은, 3가지 제목중에서, 닌텐도의 사원이 선택한 동키콩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서해안으로 배편을 통해 보내진다.

1981년, 미국에서 동키콩의 발매가 이루어 지게 되는데, 게임의 내용은 플레이어가, 제한된 목슴의 마리오를 움직여, 애인을 고릴라로부터 구출한다는 스토리로, 플레이어는 여러가지 장애물을 넘어서, 미녀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하고 쉬운 게임 규칙과, 흔하지만 매력적이었던 스토리라인, 그리고 재미있었던 게임성으로 이게임은 닌텐도 게임 최초로 이체로운 느낌을 가지게 된다.


- 동키콩의 권리를 타이토에 -

동키콩을 본 일본 기업 타이토(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만든 회사)는 동키콩의 권리를 모두 사고 싶다며 고액의 금액을 제시하며 NOA에 제안을 했다. (아직 그시기는 동키콩이 그다지 팔리고 있지 않은 시기였다)

아라카와는 고민 끝에 , 결국 타이토에 권리를 팔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동키콩은 엄청나게 팔리게 된다. 아라카와는 지금의 이익 보다는 장래의 이익을 생각한 이 판단이 올바른 판단 이였음을 증명했던 것이다.


- 재미로 보는 NOA의 사장 아라카와의 최후 -

90년대 후반 닌텐도의 수장 야마우치 히로시의 은퇴가 예상되는 가운데 후계자로 지목된것은 야마우치씨의 사위이며 NOA의 사장 아라카와씨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야마우치는 이라카와를 닌텐도 이사직에서 해임해 버린다. 그결과 닌텐도의 경영은 할연구소의 사장 이와타를 대표로 미야모토 시게루를 비롯한 6인 공동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야마우치가 아라카와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자신은 친족에게 계승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사업관이 판이하게 달랐던점을 제일 큰 요소로 꼽고 있다. 야마우치가 보유자금을 두터이 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새로운 도전을 하는 중소기업적 방식을 띄고 있다면 아라카와는 자금으로 무리하게 확장을 하는 형태인 대기업의 기업 관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게임업계의 불황과 북미 시장에서의 닌텐도의 위축을 본다면 그 당시 야마우치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볼수 있다.


- 대히트~!!! 게임&워치 -

야마우치가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던 전자 공학 응용 완구의 가능성은 그러나 1970년대에 닌텐도의 경영 악화로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그 길고 어두운 터널 안에서도 닌텐도는, 새로운 전자 공학 엔터테인먼트 로의 모색과 탐구를 계속해 오게 된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 엄청난 노력과 시행 착오가 결실을 이루면서, 마침내 닌텐도 제국 전성기의 신호탄을 알리는 제품을 만들게 된다. 전자 공학을 응용한 완구, 휴대형 게임기라는 제품이 바로 그것이다.


- 휴대 할 수 있는 소형 게임기 -

어느날, 요코이는 신간선 안에서 샐러리맨이 계산기를 꺼내 심심풀이로 버튼을 누르면서 놀고 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이 순간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는 작은 게임기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 아이디어를 야마우치에게 이야기 하게 되고, 야마우치는 세계 제일의 계산기 회사 샤프와 협의 하여 계산기 사이즈의 게임기를 제작하게 된다. 그리고, 휴대용를 염두한 디자인이 설계되는데, 사람은 앉았을 때 손을 잡는다라는 점에서 착안, 엄지손가락 으로 밖에 조작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모양의 케이스가 만들어 지게 된다. 같은 이유로, 콘트롤러도 단순하게 만들어, 버튼을 누를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제작되게 된다.


- 게임&워치 발매 -

1980년 봄, 세계 최초의 휴대형 액정 게임 머신 게임&워치가 발매된다. 간단히 이용 할 수 있는 단순한 게임성이 돋보이며, 성인용으로 가격을 설정(5800엔)해,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아이들한테 까지 대히트를 거두게 되어 마침내 전 일본에서 붐이 일어나게 된다.

야마우치는 매출을 보고, 게임&워치 시리즈의 시리즈화를 진행시킨다. 요코이는 게임 아이디어를 생각해, 게임 디자인으로도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 요코이 군페이의 철학 -

요코이가 생각하는 철학은 지나간 기술의 수평적인 사고 라고 하는 것이 있다. 지나간 기술이란 최첨단 것이 아니고, 대중적으로 이용할수 있는 제작이 저렴한 기술을 말한다. 수평사고란 원래있던 용도의 기술을 다른 제품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계산기의 기술이 게임&워치에 사용되었던것 처럼)

게임&워치는 소형 계산기의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5000엔 정도로) 실현되었던 것으로 이후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도, 소형의 액정 TV가 나오고 그 기술이 대중적이 될 무렵 나왔던 것이다.

요코이는 이렇게 말한다.

"기술자가 자주 착각하기 쉬운점은, 굉장한 기술로 굉장한 것을 만들어내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대중적인 기술로 수평적인 사고를 해야만, 히트 상품이 태어날수 있는 것이다"


- 게임&워치의 전성기 -

게임&워치는, 전세계에서 판매되어 나이와 국적을 가리지 않고 큰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가격은 5000엔 정도였기 때문에, 당시의 완구수준으로서는 결코 싼 것은 아니였지만 이것으로 인해 야마우치가 알게 된 점은 전자 공학 완구는 아이 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사간다라는 사실과 오락은, 재미있으면 조금 비싸도 유저는 사 준다라는 확신이었다.


- 멀티스크린 -

야마우치 사장은 게임&워치로 2명의 게이머가 게임을 동시에 즐길수는 없는가라는 아이디어를 내게 되어, 그 아이디어에서 출발, 2개의 액정 화면을 채용한 새로운 형태의 게임&워치가 탄생하게 된다.

1982년, 게임&워치 멀티스크린이 등장하고, 이 제품도 대히트를 기록한다. (그 밖에도, 칼라 스크린·MICRO VS.SYSTEM 등이 있다. )


- 닌텐도 독점 십자 키의 탄생 -

처음으로 십자 키가 채용된 것은 게임&워치의 동키콩이었다. 지금까지의 업무용 게임이나 가정용 게임기의 콘트롤러는, 조이스틱이나 볼륨 패널이 부착 되어 있었다. 게임&워치는 얇고 작기 때문에 그것들은 붙일 수는 없었다.

요코이는 엷은 크기의의 죠이스틱을 구상하고 시행 착오를 반복해, 지금의 십자형태의 키를 발명 한다. 십자형태로, 위를 누르면 아래가 떠오르는 구조로 조이스틱을 보지 않고도 감촉만으로 누르고 있는 방향을 알게되는 제품이였다. 게다가 조이스틱에 비해 사용하는 근육이 적기 때문에 조작을 하면서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십자키는 후에 패밀리 컴퓨터에도 탑재되고 단순하고 뛰어난 조작성은 빌게이츠 조차도 미래의 멀티미디어 기기에 채용되는 것은 십자 키 라고 말하게 된다.

게임&워치의 전세계적인 대히트에 인해, 닌텐도는 세계 진출을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짊어지고 있던 부채를 모두 해결하게 된다. 전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고 수익을 얻는 우량 기업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버린 것이다. 그리고 후에 세계를 석권 하는 가정용 게임기를 등장 시키는 원동력에도 이바지 하게된다.


- 본격적인 제국의 건설 패밀리 컴퓨터 -

게임&워치의 세계적인 대히트로 돈이 쌓이기 시작한 닌텐도는, 이윽고 그 자금력을 아케이드 게임에 투자, 동키콩시리즈, 마리오 브라더즈, 아이스 크라이머, 렉킹 크루 등의 히트 상품을 연달아 내놓게 된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게임의 소프트, 하드 두가지 분야에서 지지기반을 확고히 다짐과 동시에 노하우를 쌓아 새로운 멀티 소프트 형태 가정용 게임기의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 아타리 VCS의 성공으로부터 -

1977년에 미국에서 아타리가 발매한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VCS는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여 82년까지 미국에서만 1500만대의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아타리는 카셋트 방식을 채용한 가정용 게임기로, 카셋트를 바꾸면 새로운 소프트를 즐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닌텐도가 제작해 오던 소프트 내장 방식의 제품이 아니였다.

야마우치 사장은 아타리의 부실한 그래픽과 사운드를 보면서 이런 제품은,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혹평을 했지만 야마우치 사장도, 아타리의 대 성공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다.

1980년대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살펴 보자면

1980년을 시작으로 일본, 미국의 완구, 가전 메이커는 회사마다 가정용 게임기를 연달아 출시하여 가정용 텔레비젼 게임 시장은, 춘추 전국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을 때였다.

+ 80년대 초반의 주요 가정용 텔레비젼 게임기 +

발매시기 제품명          메이커      CPU(bit)   가격
81/07     카셋트 비전     신기원      4bit     13,500
82/06     인 텔레비젼     반다이      16bit     49,800
82/09     오디세이 2      필립스      8bit       - 
82/10     태             토미        16bit     59,800
82/11     게임 PC        타카라      8bit     59,800
82/11     막스 머신       줄 실업 수당 8bit     34,800
82/11     다이 도우미 존  야마기와    16bit     34,800

당시의 일본에서는 PC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으로 대부분의 기업이 텔레비젼 게임기의 사양에 PC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제작했다. 키보드를 장착하거나 프로그램을 제작 할수 있거나 게임 뿐만이 아니게 범용성도 가지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텔레비젼 게임기의 가격은 (일명 취미용 PC) 4∼5만엔이 주류였다.


- 닌텐도 가정용 게임기의 개발 -

"적어도 다른 회사가 일년안에 따라 올수 없는 것을 만들어라." 이것이 닌텐도의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있어서, 야마우치 사장이 개발진에게 내린 명령이였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른회사 제품보다 기술, 가격 양면에서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야마우치가 설정한 목표 가격은, 9800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능에서는 다른 제품을 능가해야 한다고 야마우치는 이야기 했다.


- 닌텐도의 새로운 가정용 게임기의 프로젝트 명은 영 컴퓨터 -

영 컴퓨터의 하드웨어 개발은, 개발 부장, 카미무라 마사유키가 담당 하게 된다. 개발 목표는 철저한 비용 절감과 뛰어난 기능. 카미무라는 우선, 타사의 게임기를 연구했다. 모든 제품이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지만 게임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필요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미야모토 시게루 등의 디자이너들과 업무용 게임의 개발 팀과 협력해, 게임에 필요한 요소들을 확인해 게임에 필요한 기능을 결집시킨, 제품을 목표로 정했다.

중앙 연산 장치(CPU)는 가격적인면에서 8 비트로 결정. 당시 애플 컴퓨터에 사용되고 있던 CPU-6502를 선택 하였다. 화상 처리용의 칩(PPU)에는 전용 IC를 개발했고, 발색수,스프라이트수, 처리 스피드의 실험을 반복하고 수정해서, 최대수를 결정해 나갔다.


- 스타디움 -

닌텐도 가정용 게임기의 개발자들은 패미컴을 스타디움이라고 불렀다. 스타디움의 의미는 가정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게임을 즐길수 있는 경기장이라는 의미였는데 다시 말하면, 가정용 게임 센터라고 정의 내릴수 있었다. 게임 센터의 게임을 가정에서 즐길수 있는 게임기. 그런 컨셉으로, 소프트웨어를 기둥으로 한 하드웨어 개발을 해나가게 된다.


- 조금씩 만들어져 가는 패미컴의 모습 -

1982년, TV화면을 256×240으로 분할, 하나 하나의 점에 54색의 색을 뿌릴수 있는 당시의 업무용 게임기의 게임을 재현 할 수 있는 커스텀 칩을 개발하게 된다. 칩 개발 제휴처인 리코와의 가격 교섭에서 리코는 납입 가격 2000엔 이내라는 닌텐도의 의견에 난색을 나타내지만, 야마우치 사장의 2년간, 300만개의 구입을 보증 하겠다는 말에 리코는 요구를 수용, 15000엔에 이르는 본체 가격이 책정되어지게 된다.

케이스와 콘트롤러는, 요코이가 인솔하는 개발부서의 일부가 담당헀는데 케이스에는 원가가 저렴한 빨강과 흰색의 플라스틱을 사용한 디자인, 방향 지시 패드에는, 튼튼하고 저렴한 비용의 십자키가 채용되어 버튼은 2개 장착, 2개의 콘트롤러 중 한쪽에는 마이크로폰을 붙였다.

+ 83년 발매 주요 가정용 텔레비젼 게임기 +

발매 시기 제품명     메이커 CPU(bit) 가격
83/03    아루카데아   반다이 8bit    19,800
83/05    ATARI 2800  ATARI  8bit    24,800
83/07    태쥬니어     토미   8bit    15,200
83/07    SC-1000    세가   8bit    15,000

83년에 들어서면서, 게임기의 가격대는 2만엔 전후가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토미나 세가는 아직까지는 PC의 개념을 기반으로 제작한 게임기들이 였다. 반다이는 총력을 기울여서 아루카데아를 발매하게 된다.


- 패미컴 본격적인 발진 시동 -

1983년 5월, 패미컴 발매에 앞서, 야마우치 사장의 초심회(도매상 업자) 연설이 있었다.

"이 패밀리 컴퓨터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게임기 제품의 가격은, 14800엔 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도매상은 충분히 팔릴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수 있습니다만, 소프트웨어의 재미가 보장되므로 반드시 패밀리 컴퓨터는 팔릴것 입니다."

패밀리 컴퓨터 발매에 있어서 닌텐도의 전략.

1. 저렴한 가격 설정 - 하드는 부모가 아이에게 사주어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을정도의 가격을 목표로 최대한 억제한다.

2. 뛰어난 성능 - PC의 불필요한 기능을 일절 배제해, 게임만을 중시 하는 기능에 특화 시켰다.

3. 소프트 중시 - 게임 소프트를 가장 중시해, 다양하고 충실한 라인 업을 제작한다.

+ 지금까지의 하드로 돈을 버는 전략이 아니라, 하드를 보급 시키고 소프트로 이익을 창출한다 +

그 당시 이미 야마우치의 머릿속에는 유저는 소프트를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하드를 산다라는 사실과 유저는 항상 새로운 소프트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것이다.


- 패밀리 컴퓨터 발매~!!!! -

1983년 7월 15일, 패밀리 컴퓨터가 일본에서 발매된다. 동시 발매 소프트로는, 동키콩, 동키콩 JR, 뽀빠이.

1984년 1월에는 오목, 마작, 마리오 브라더즈가 발매되게 되고, 이어서, 11월에는 뽀빠이의 영어 놀이, 12월에는 베이스볼, 동키콩 JR의 산수 놀이가 발매된다. 그 이후에도 테니스, 핀볼, 광선총 시리즈 와일드 건맨, duck 헌트, 호간즈아레이, 골프등이 연이어서 발매되게 된다.

패밀리 컴퓨터는 충실한 소프트 라인업, 업무용 소프웨어의 완벽이식, 대전, 사고력 게임등으로 인기가 치솟아, 발매로부터 반년만에 47만대, 다음 해에는 165만대를 팔아, 닌텐도의 가정용 시장 독주 태세에 들어가게 된다.


- 써드파티와 시장 관리 -

닌텐도는 처음에는, 다른 게임기 메이커와 같이 패밀리 컴퓨터용 소프트를 자사에서만 독점해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소프트 수의 부족과 다른 게임기와의 차별화 전략으로, 야마우치는 서드파티에 참가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 생겨난 제도가 닌텐도만의 독자적인 라이센스 공여 제도다.


- 아타리 쇼크로부터 -

1982년 2월말, 미국에서 폭발적인 보급을 이룬 아타리 VCS의 거대 시장이 붕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타리의 성공에 편승해 다수의 소프트 제작 메이커가 소프트 제작에 참가하게 되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ATARI사는 소프트 퀄리티 유지를 위한 어떠한 기준이나 제도가 없었기에 시장에 질이 낮은 소프트가 급증하게 되고, 소비자들은 그러한 저질 소프트의 범람으로 소프트에 싫증을 느껴버려 결국 아무도 아타리를 플레이 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결과 한때는 30억 달러를 넘어가고 있던 시장이, 1억 달러 이하로 급격하게 위축되는 상황이 발생해버렸다.

상품으로서 대성공을 거둔 ATARI VCS 시장이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순식간에 세상으로부터 자취을 감추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지켜본 닌텐도는 사실을을 심각하게 고려해 법률 연구가들과 검토를 거듭한 끝에, 독자적인 기술이나 판매 제도를 고안해, 패밀리 컴퓨터 시장을 관리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 야마우치의 말 아타리 쇼크에 관하여... +

"결국 일어나 버렸더군요, 유저들은 비슷한 내용에는 곧바로 질려버리거든요. 처음에는 모든것이 새롭기 때문에, 모두가 즐겼습니다. 유저들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모두 즐거워했죠. 그러나 유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비슷한 내용에 곧바로 질려버리기 시작했죠. 하나의 하드로, 수 많은 게임을 즐길수 있다고 해도, 모든 게임이 새로운 재미나 매력이 없으면 당연히 즐기지 않게 되죠. 그것을 우리는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 결과, 아타리 시장은 사라져 버렸죠.

예를 들면 10가지 소프트중 1개에서 2개의 훌륭한 게임이 있으면, 하드유저들의 수요가 집중해서 시장을 유지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수 백가지의 소프트가 나오더라도 비슷한 내용의 게임이라면, 유저들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죠. 이것이 바로 게임의 세계입니다.

텔레비젼 게임은 게임일뿐입니다. 의식주 같은 생활필수품 이라면 몰라도, 텔레비젼 게임을 할수 없기 때문에 생명에 지장이 있거나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게임은 유저들에게 있어, 막상 사려져 버린다 해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지장있다거나 그런일은 없습니다. 재미있거나 새롭지도 않은 게임에, 많은 돈을 지불해가면서 까지 게임을 즐기려는 유저는 없을것입니다"


- 시장 관리의 사상 -

패밀리 컴퓨터 시장에서,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의 반복된 실패는 절대로 일어나면 안된다는 일념하에, 하드 메이커가 소프트의 퀄리티를 체크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아타리 쇼크는 피할 수 없다라는 정신으로, 독자적인 시스템을 생각해 내게 된다.

닌텐도는 우선 상표를 부각시켰다.

패밀리 컴퓨터, 패밀리 컴퓨터는 닌텐도의 상표다. 패밀리 컴퓨터와 관련해서 상품의 모든 패키지, 카트릿지의 뒤, 설명서, 잡지나 서적 등에 게재함으로써 상표를 확립, 닌텐도의 허가 없이는 브랜드에 무임승차 하는 상법을 금하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위반할 경우 부정경쟁 방지법으로 대처 할수도 있었다.

소프트 메이커는 닌텐도의 승낙을 받지 않고는 패밀리 컴퓨터의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덛붙여 서드파티가 패밀리 컴퓨터 소프트를 제작하려면 닌텐도와의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제도를 확립, 라이센스 승인을 하기전에 소프트 메이커에들에게 3가지 조건을 약속 받았다. 그 내용은

1. 게임 내용에 대해서 닌텐도의 심사를 받을 것.

2. 소프트 제작수를 (닌텐도와 협의한 후) 연간 1∼5개 이하로 제작할것.

3. 소프트 생산을 닌텐도에 위탁해, 수주시 제조비를 먼저 지불 할것.

이러한 관리 방식에 의해, 엄격한 조건아래, 패미컴 시장을 관리하게 된다.

닌텐도는, 상표권에 의한 부정경쟁 방지법과 초심회에 의한 유통 지배에 의한 시장을 지키는 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 초심회 -

닌텐도는 과거로부터 조직화되어 있던 완구 유통 회사들의 집합체인 다이어회를 초심회라고 고쳐 초심회의 판매망으로 패밀리 컴퓨터와 패밀리 컴퓨터의 소프트를 유통하게 된다. 초심회는 닌텐도와 일차 도매상의 친목 단체로, 처음은 프레잉카드, 훗날 게임&워치등 상품을 통해서, 대기업 50곳 이상의 오류 유통조직으로서 형성되어 있었다.

가정용 게임기의 판매는 한창 잘나갈때는 완구 도매상의 총매상의 70%에 달했기 때문에, 패밀리 컴퓨터가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가지는 것과 동시에 유통에 있어서도 닌텐도의 지배력은 강해졌다.


- 서드파티에 개방 -

닌텐도가 최초로 라이센스 공인을 해준 회사는, 당시 컴퓨터 소프트 대기업 허드슨과 업무용 게임기의 최대기업 남코였다.

양 회사는 84년 여름부터 소프트를 팔기 시작한다. 허드슨은 너트&밀크를 발매하고 로드 러너는 140만장의 대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남코도 팩맨을 비롯한 유명 소프트를 발매하게 된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 하게 되는 제비우스는 150만장의 판매량을 올리게 된다.

허드슨, 남코에 이어서, 타이토, 코나미, 캠콤 등등 여러 회사가 참가하게 되고, 닌텐도는 이 6곳까지만 초기 라이센스 기업으로서 우대 했다. (소프트 발매 갯수 제한 없음, 자사 라인으로 카트릿지 생산 가능등... )

6사는, 패밀리 컴퓨터의 시장점유율에 매력을 느껴 자사의 소프트 개발력을 최대로 활용, 각각의 우수 분야에서 업무용 게임 및 PC 게임으로 이식을 하게 된다. 연이어 발매되는 인기 소프트들이 아이, 어른, 게임 매니아까지 사로잡아, 패밀리 컴퓨터의 매출을 가속화 시켜, 1984년 말의 완구 판매경쟁은 패밀리 컴퓨터 일색이 되었다.

남코나 허드슨의 대 성공을 기점으로 소프트 메이커들이 잇달아 패미컴 참가를 희망하게 된다. 이것을 기회로 닌텐도는 수탁 생산 방식으로 전향, 자사의 엄격한 시스템을 의무 부여하게 된다.


- 닌텐도는 더빙가게 -

그 당시 야마우치 사장은 하드웨어 제작사는 메이커는 아니고, 더빙가게 라고 생각해 주세요 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서의 더빙가게란 소프트웨어를 수탁 생산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고 있는 하청 기업을 뜻한다. 닌텐도는 이 독자적인 구조를 만들어냄으로 인해서, 위험부담 없이 전세계에서도 보기 힘든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닌텐도의 고수익의 원천은 바로 이러한 구조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의 반복된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 저질 소프트 범람를 막는 시스템을 구축해, 닌텐도의 지배하에 서드파티를 두어, 스스로의 이익 구조를 만들어 내게 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닌텐도의 횡포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타리 쇼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소프트 퀄리티의 유지가 필수불가결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 닌텐도에게 있어 새로운 전환점 -

서드파티에 의한 인기 소프트가 패밀리 컴퓨터 인기를 가속화 시키는 중, 닌텐도의 게임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는, 패밀리 컴퓨터의 능력을 잘 살린 전 세계 비디오 게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서드파티의 참가에 의해, 패밀리 컴퓨터는 일본 열도를 석권하며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된다. 패밀리 컴퓨터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운에, 닌텐도 안에서, 일본 열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는 보편적인 걸작이 태어나게 되는데.....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1985년 9월 13일, 패밀리 컴퓨터의 인기를 폭발 시켜버리는 소프트가 등장 했으니... 동키콩 마리오 브라더즈에 이어서 미야모토 시게루가 직접 제작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였던 것이다.

수많은 월드로 구성된 게임 세계에는, 독창적인 캐릭터가 돌아 다니고 있고, 불가사의한 장치들이 마리오에게 차례차례 다가온다. 플레이어는 즐거운 공간에서 돌아다니면서 노는것이다. 미야모토는 이 게임에 시각, 청각에 가세해 스스로의 체험으로 얻은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게 된다. 이름하여 마음 감각 마음감각은 설레임이나 두근거림을 충분하게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영화나 문학, 애니메이션과 융합 시켜, 그것을 게임으로 승화 시키게 된다. 이 소프트의 발매와 함께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되는 패밀리 컴퓨터, 아이들은 물론 어른, 아마추어, 매니아까지 이 게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윽고 전 일본열도에서 사회 현상이라고 말해질 정도의 대붐을 일으키게된다.(훗날 닌텐도는 포켓 몬스터라는 게임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뒤집어 놓게된다)


- 움직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

미야모토는 슈퍼 마리오가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이유에 대해서 (시게루 자신의 견해)

"플레이어가 즐거워하니까, 나는 언제나 그 즐기는 모습만으로도 기쁩니다.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이 있었습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등장했을 무렵부터 내가 생각하고 있던 철학은, 움직이고 있는것 만으로 몇번이고 계속 즐기고 싶은 게임을 만들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즐기는 사람도 첫번째 스테이지의 최초의 화면 밖에 본 적이 없지만, 이 게임은 너무 좋아라고 말해 주는 것 같은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 버리는것에 관해서 -

"대화형, 인터랙티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이 납득 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게임에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 합니다. 마치 이건 자연을 기반으로 만든 모험 정원 같은 것입니다. 향후 기술이 발전해서 기술을 사용해 여러가지 것을 할 수 있도록 되었을 때, 내가 생각하는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과 유저들이 생각하는 자연이라고 하는것이, 마치 서로 대화하는것 처럼 만들어 지게 되는것은 어떨까요. 그것을 할수 있다면 유저는 자신이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8년 카나자와에서 행해진 강연에서, 미야모토는 TV게임을 타미디어와 비교해, TV게임은 유저 스스로 접하는 영상이라는 발언을 하고 있다. 모험정원 이것이 미야모토가 생각하는 TV게임의 본질인 것이다.

훗날 1996년 닌텐도는 슈퍼 패미컴의 후속 기종인 닌텐도 64를 발매하게 된다. 동시발매 타이틀인 슈퍼 마리오 64는 그가 항상 꿈 같이 주장해온 모험정원의 현실화로 유저 평론가 할것 없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3D게임의 이정표 같은 작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또 다른 계획이던 유저와 개발자간의 대화 인터렉티브한 게임을 닌텐도는 64DD라는 하드웨어로 실현하려고 하지만 발매 타이틀의 부제와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으로 미야모토의 또 하나의 꿈은 닌텐도 64의 후속 기종으로 미루어 지게된다.


- 미국에서 NES 발매 -

1985년 연말부터 NOA는 미국에서 패밀리 컴퓨터 발매를 시작 했다.아타리 쇼크로 인해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시장은 사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NOA는 비디오 게임기로의 이미지가 아닌,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TV를 사용한 새로운 완구의 이미지로 판매하기 시작 했다.

그 당시 판매 촉진으로서 동봉시킨 제품은, 요코이가 만들었다. 광선총 시스템과 광선총 기술을 응용한 로보트 시스템 블록과 자이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없었던 재미있는 물건이라는 평가를 얻어, 서서히 소비자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북미에서 NES가 서서히 알려지고 있을 무렵 일본 닌텐도가 개발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NES 본체에 동봉해 팔기 시작 하게 된다. 슈퍼 마리오의 인기로 NES의 인기가 급격히 상승, 1988년까지 북미에서만 700만대를 판매하게 된다. 아이에게 Let's play Nintendo! 유행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NES는 폭발적 인기를 모으게 된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도 패밀리 컴퓨터(NES)는 맹렬한 기세로 팔리게 된다. NOA의 당초 예상한 연간 1억 달러 목표의 매상이, 100억 달러로 엄청나게 상승, 닌텐도는 전세계에서도 이름을 떨치는 거대기업으로 입 후보 하게된다.


- 키잉시스템 -

미국에서는, NES의 성공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해적판 소프트가 난무하게된다. NOA는, 전술적 라이센스 공인 시스템만으로는 시장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여기에 대응해 NOA는 소프트의 불법 복제를 막는 보안 시스템을 개발한다. 게임 카트릿지에 복제를 방지할수 있는 메모리를 내장, 하드에는 복제 카트릿지를 진단할수 있는 마이크로 컴퓨터를 내장 해서, 만약, 불법 라이센스로 카트릿지를 만들어도, 하드웨어 내에서 감지해 소프트가 인식되지 않는 구조를 개발 해내게 된다.

그리고 닌텐도는 이 시스템을 특허권과 저작권에 등록 하게된다. 소프트 개발사 입장에선 닌텐도와 라이센스 계약을 하지 않으면 카셋트에는 인식 칩이 내장 되지 않기 때문에 게임이 실행되지 않는 구조인것이다.

이렇게 해서 패밀리 컴퓨터는 일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TV게임 시장을 완전히 제패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일, 미의 TV게임 시장은 패밀리 컴퓨터에 의해 엄청나게 팽창, 발전해 나가게 된다.

시장의 지배권을 손에 넣은 야마우치는, 자신의 새로운 구상의 실현을 향해 도전을 시작하는데......


- 야마우치의 디스크 시스템 구상 -

패밀리 컴퓨터의 대 성공에 힘입어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에 여러가지 주변기기를 접목시켜, 정보 단말기의 용도로서 다목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장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위해서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의 뒤편에 확장 커넥터를 장착 시켰는데, 이미 패밀리 컴퓨터에는 PC 애플과 같은 CPU가 사용되고 있었다.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를 홈 컴퓨터로 만들려는 장대한 계획을 시작 하게 된다.


- 패밀리 베이직 -

닌텐도가 허드슨과 공동으로 개발한 패밀리 베이직은, 패밀리 컴퓨터에 베이직 언어를 탑재한 카트릿지를 삽입해, 카트릿지를 키보드와 연결 시킨 구조로 되어 있었다. 패밀리 베이직의 기능은 패밀리 컴퓨터로 간단한 프로그램을 제작할수도 있고 모니터 상에서 음표를 배치해서 간단한 음악을 연주 할수도 있고, 간단한 워드프로세서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가 워드프로세서나 가계부 등의 기능으로 기존의 PC를 대체할만한 잠재 능력이 있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패밀리 베이직이 널리 보급된다면 패밀리 컴퓨터는 워드프로세서나 PC의 기능으로서의 정보 기기의 표준 규격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능이 게임의 기능에 최적화된 메모리의 한계로인해서 PC로서의 기능은 어중간 할수 밖에 없었던게 현실이었다. 간단한 프로그램과 음악은 만들수 있었지만, PC로서의 기능 미달로 야마우치의 첫 구상은 계획으로만 끝나게 된다.


- 패밀리 베이직 V3 -

패밀리 베이직의 계획에서 교훈을 얻은 닌텐도는 다시 한번 허드슨과 손잡고 패밀리 베이직의 버젼업 판인 패밀리 베이직 V3를 개발, 판매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의 PC기능과 비교해서 조금은 향상되었지만 역시 간단한 프로그램 밖에 만들수 없었고, PC로서의 기능 부재로 시장에서의 매출도 부진, 유저들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한다.


- 디스크 시스템 -

패밀리 컴퓨터 발매가 2년이 지날 무렵 1985년 중순 닌텐도는, 소프트의 발매 증가와 반도체 가격의 상승으로 인해서 카트리지의 가격이 상승되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닌텐도의 눈에 들어 온것이, 전자 부품 제작사, 미토미가 PC 전용으로 개발한, 퀵 디스크 라고 하는 외부 기억장치 였다. PC의 플로피 디스크와 비교해서, 비용이 저렴하고, 구조도 단순해 대량생산의 조건에도 부합되어, 패밀리 컴퓨터용의 외부 기억장치로 상당히 적합했다. 게다가 카트릿지의 용량이 롬 카트릿지 보다 크기 때문에 소프트 내용의 발전 역시 도모 할수 있었다. 소프트의 가격도 카트릿지는 5000엔을 넘어 갔지만, 디스크 시스템으로 낸다면 3000엔 정도로 절감 할수 있었다.

이런 장점에 매력을 느낀 닌텐도는, 미토미와 교섭에, 100만개의 수주 조건을 제시하게 된다. 미토미가 조건을 받아 들임으로서 15000엔 정도의 당시의 디스크 드라이버의 가격으로는 경이적인 저렴한 가격이 형성되게 된다.


- 디스크 시스템 발매 -

1986년 2월 21일, 디스크 시스템의 발매와 동시에 전국의 매장에는 디스크 라이터의 설치를 개시하게 된다. 디스크 시스템의 장점으로는 대용량, 선명한 사운드, 저장이 간단하다 등이 있었으며 닌텐도는 디스크 시스템으로만 소프트를 공급 한다는 구호와 함께 전국에 디스크 라이터 1만대의 설치를 약속함으로써, 패밀리 컴퓨터의 뉴미디어를 캐치프라이즈로 내걸게 된다. 디스크 시스템은, 발매년도에만 224만대를 팔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 젤다의 전설 탄생 -

디스크 시스템 발매와 함께 대표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미야모토 시게루가 제작한 젤다의 전설을 들수 있을 것이다. 젤다의 전설은 디스크 시스템과 같이 발매되어 3개월에 50만개를 판매하는 인기를 누리게 된다.

미야모토가 제작한 액션 RPG인 젤다의 전설은, 가정용 게임 최초의 RPG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작품이였다. 미야모토가 창조한 필드맵 시스템과 로드 타이틀 시스템은 향후 발매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RPG 드래곤 퀘스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임에 영향을 주게 된다.

미야모토는 젤다의 전설을 제작할때 마리오와 같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체험을 기반으로 비디오 게임 역사상 가장 완벽하다는 칭송을 받을 정도의 독보적인 게임 인터페이스와, 시스템. 세계관을 제작하게 된다.


- 발매 1년후의 부진 -

디스크 시스템은 발매 년도에는 200만대 이상을 팔정도로 호조 였지만 87년에 75만대, 88년에 29만대, 89년에 11만대와 같이 하드의 매상이 해가 갈수록 점점 감소 하게 된다. 그 원인은 서드파티에게 디스크 시스템 라이센스가 엄격하게 부여되서, 인기 소프트가 디스크 시스템으로 발매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반도체 기술의 발전으로 카트릿지의 가격이 하락, 디스크의 용량이 디스크 시스템보다 앞세게 되고 배터리 백업 시스템이 개발되어, ROM 카셋트로도 저장이 가능하게 되는 등 기존 디스크 시스템의 장점이 모두 카트릿지로도 실현됨으로서 디스크 시스템만의 장점이 사라지게 된다.

한편으로 유저의 입장에서는 디스크 시스템의 로딩이 스트레스로 작용하게 되어, 하드웨어 자체의 악평도 생기게 된다.

결국 디스크 시스템은, 서드파티에게도 소비자에게도 패밀리 컴퓨터의 반향을 다시 얻을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아직도 닌텐도는 디스크 시스템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 패밀리의 네트워크 시스템 -

디스크 시스템의 발매 이후 야마우치는, 시장의 한계가 보여지는 TV게임 사업을 넘어서, 수요가 큰 통신사업으로의 사업 변환을 시도 하게 된다. 1988년,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통신 네트워크의 구축을 시작하게 된다.

대표적인 패밀리 컴퓨터 네트워크 서비스를 들자면 우편발송, 예금, 계좌 이체, 주식 거래, 홈 뱅킹, 마권등록, 서점, 통신교육 등등의 다양한 용도의 서비스가 시작되지만, 어느 부분도 크게 성공 하지는 못한다.

패밀리 컴퓨터 단말기는 나름대로 보급되지만, 외적인 요소로 인해서 출발부터 인식이 좋지 않았다.

심리적인 문제로 패밀리 컴퓨터는 아이용 완구 이므로 금융 거래는 무리가 있다는 인식과 함께 반대로 패밀리 컴퓨터를 사용한 통신교육이나 유저들의 인식은 전무한 상태 였다. 역시 최대의 문제점은 통신 환경이였는데, 일본의 일반 가정에게는 전화회선이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장시간 사용시 통신에 부과되는 요금도 네트워크 보급의 큰 장애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디스크 네트워크를 도입한 가정은 전국에서 13만 가구에 그치게 되고, 그럼데도 불구하고 야마우치 사장은 모든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지만, 얼마 못가서 시작한지 얼마 안된 네트워크 사업을 철수하게 된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패밀리 컴퓨터의 기세는 약해지게 된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도 세가나 NEC가 닌텐도에게 도전하고 닌텐도는 새로운 게임기의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 요코이 군페이의 역작 게임 보이 -

80년대 초반 전세계에서 큰 인기를 모은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와치는 기본적으로 게임기 자체에 내장된 한가지 게임 밖에 즐길수 없었다. 유저의 입장에서는 다른 게임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되면 다른 게임이 내장된 게임기를 사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프트 내장 방식의 게임&와치로 부터 8년, 요코이 군페이를 중심으로한 1 개발부는, 카트릿지로 소프트를 교환할수 있는 방식의 휴대용 게임기를 개발하게 된다.


- 휴대용의 패밀리 컴퓨터 -

게임보이의 개발 슬로건은 패밀리 컴퓨터 보다 싼 가격으로 게임기를 유저에게 공급한다 였다. 이 과제가 멀티 소프트 형태 휴대용 게임기에게 요구되는 지상 명제였던 것이다.

휴대용이기에, 액정 모니터를 장착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이유가 있었으나, 저렴한 가격으로 컬러 액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흑백 액정에 게임&와치의 경험을 기반으로 샤프와 협력해 개발하게 된다.

당초 계획은 게임&와치에 사용 된 계산기용의 TN액정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요코이는 샤프가 TN액정으로 만든 시 제품을 보고 합격 판정을 내린다. 샤프는 40억엔을 투자해서 게임보이 액정 전용 제조 공장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샤프의 시 제품을 본 야마우치 사장은 "뭐야 이건. 외관이 이상 하잖아" 라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확실히 게임보이는 게임&와치 보다 본체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액정을 정면으로 봤을때,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야마우치의 게임보이에 대한 외관 액정에 대한 부정적인 코멘트로, 한때는 생산을 하지 말것인가라는 의견이 나와서 요코이는 절망의 처하게 된다.

하지만 요코이는 반드시 성공할것이라는 신념으로 다시 한번 개발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두번째 개발 도중에 채용된 액정이 STN 액정 이다.

STN 액정은, 정면에서 선명하게 보이지만. 화면 스피드를 증가 시키면 콘트라스트가 떨어져 버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인간의 눈이 콘트라스를 자연스럽게 보정해 준다는 사실을 요코이는 발견을 해내고 그렇게 요코이의 두번째 액정 개발 시도는 뜻하지 않게 성공하게 된다.

요코이의 노력으로 드디어 액정 화면과 스피드를 모두 만족 시키는 액정 모니터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 야마우치가 게임보이의 화면을 흑백으로 만든이유 -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의 인터뷰 중에서...

"컬러 화면이 일반화 되는 시대에 흑백 액정을 채택한 게임보이는, 다른 회사의 시각에서 본다면 닌텐도가 시대를 역행하는게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다지 팔리지 않을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게임보이의 장점인, 어디서나 언제라도 즐길수 있다라는 점, 다시 말해 기차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바닷가에서도, 산에서도, 어디에서나 휴대하기만 하면 즐길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였습니다. 나 자신은 요코이와 함께 이 상품은 일본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전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크게 성공할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칼라 액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기술로는 태양 아래에서 화면을 보면 빛의 반사로 인해서 잘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이유는 3개의 건전지를 사용해서, 흑백 액정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플레이 타임밖에 유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휴대용이라는 용도로는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품으로는, 휴대용 게임기로서 유저들의 좋은 평가를 얻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닌텐도는, 게임 보이의 액정을 흑백 액정으로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 게임보이 발매 임박 -

휴대용 게임기의 개발을 총괄하는, 요코이는 원가 절감을 위해서 깎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깎았지만,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 큰 재미를 얻을수 있다는 이유로 게임보이에 통신 기능을 마지막으로 장착하게 된다. 이 통신 기능으로 게임 보이를 통신케이블로 연결해서 다른 사람과 게임 데이터를 주고 받으면서 즐길수 있게 했던 것이다.

당초 게임보이의 전원은 아답터에 의한 충전식을 기본으로 개발했었지만, 야마우치 사장은 외국인은 충전해서까지 즐기지 않는다 라고 말하면서 충전식에서 전자식에 변경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흑백 액정 디스플레이를 첨부한 휴대용 게임기가 탄생 하게 된다. 게임기의 명칭은, 카피라이터 이토이 시게자토가 게임보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 게임 보이 발매 -

1989년 4월 21일, 일본에서 게임 보이가 발매된다. 12800엔의 저가격과 더불어서 알칼리 전지 4개로 35시간이라는 긴 사용시간. 동시 발매 소프트는 슈퍼 마리오 랜드, 테니스, 블록 무너뜨리기 3가지. 소프트의 가격은 2600엔대로 당시의 소프트 가격으로는 최대한 낮춘 가격이였다.

게임 보이는 발매되자 마자 아이, 어른 가릴것 없이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게 된다. 엄청난 인기를 모으면서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즐길수 있는 매력에 곧바로 매료 되고, 샐러리맨이나 OL는 직장의 휴식 시간에 즐기면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게임 보이 라고 하는 제품을 내어 놓으며 일 인당 1대의 휴대용 게임기라고 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


- 소니의 게임맨 -

당시, 소니도 게임 보이와 비슷한, 액정 화면을 사용한 멀티 소프트 휴대형 게임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 당시의 소니의 모습을 본다면 충분히 개발될 만한 제품이였다. 그 당시 소니는,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휴대형 카셋트 플레이어 워크맨을 출시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비슷한 형식의 휴대형 게임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하지만, 닌텐도의 게임 보이의 폭발적인 대히트로 인해, 소니의 계획은 기획으로만 남게 된다.


- 닌텐도 테트리스의 판권을 사다 -

NOA의 아라카와는, 업무용으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던 게임 소프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게임은 러시아의 한 개발자가 계발한 테트라스라는 퍼즐형식의 게임이였다.

테트리스는 최초 판권은 소련으로부터, 영국의 미러사가 판권을 취득했었는데, 미러사는 1987년에 PC판 테트리스를 발매하고 미러사에게서 아타리사가 권리를 취득해서 업무용 테트리스를 제작했으며, 다시 자 회사 텐겐이 NES용으로 제작해서 팔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아타리사로부터 세가가 일본판의 업무용과 메가 드라이브용의 권리를 취득, 텐겐으로부터 BPS가, 패밀리 컴퓨터용과 PC용의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보이 에게 테트리스가 필수 불가결이라고 생각한 닌텐도는, 휴대용 게임기 판권을 취득하려고, 소련에 사자를 보내게 되는데, 이 때, 실제로는 소련측이 휴대용은 물론, 가정용 게임기로의 판권도 팔지 않았다는 사실이 판명 (미러사는 PC 전용의 판권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되어, 즉시 NOA의 아라카와 사장이 소련으로 날아와, 가정용, 휴대용 양쪽 모두의 권리를 수천만달러의 가격을 제시해서 획득하게 된다.

이 여파를 바탕으로 아타리사와 세가사, 양 회사가 취득하고 있던 판권은 가짜임이 드러나, 닌텐도로 부터 판매 중지를 당하게 된다.

세가는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너무 경솔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게 된다.


- 대전형태 테트리스 -

요코이는, 게임 보이 전용으로 개발을 시작한 테트리스를 철저하게 연구해서, 조작성을 개량하고, 새로운 게임성을 부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통신케이블을 이용한 대전 형태의 테트리스 였다.

플레이어끼리 방해 블록등으로 상대측을 공격 할수도 있었으며, 게다가 대전중에 상대의 화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심리전을 유발하는 독자적인 게임성을 창조해낸다.

1989년 6월 14일, 대전형태의 테트리스가 발매, 동시에 게임보이용 통신케이블도 발매된다. 그리고 바로 동시 발매 소프트인 슈퍼 마리오 랜드에 필적하는 압도적인 인기를 얻음으로서, 슈퍼마리오와 테트리스는 게임 보이와, 함께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 2가지 제품은 게임보이와 세트가 되어 전 세계에 발매되어 모든 나라에서 크나큰 대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1억대 이상을 판매한, 게임 보이는 세계 공통어가 되었으며, 훗날 야마우치 사장의 회고를 들어보자면

"테트리스라고 하는 소프트는, 단순하고 플레이 하기 쉬워서, 아이, 어른을 막론하고, 인류 공통으로 즐길수 있었던 소프트 였습니다.

게임보이라고 하는 하드웨어를 단기간에 여기까지 성장 시켰다는데에는 슈퍼 마리오와 함께 부정할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 다른 회사들의 진출 -

게임 보이의 성공을 계기로, 휴대용 시장에 뛰어든 회사들은 게임보이를 능가하는 칼라액정의 휴대용 게임기를 발매하게 된다. 대표적인 게임기로는 세가의 게임 기어, 아타리의 lynx (links), NEC PC엔진 GT등이있지만, 어느 하나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게 된다.


- 새로운 시장의 개척 게임보이 -

요코이 군페이에 의해 만들어진 게임&와치는 게임 보이로 진화를 해서 휴대성, 멀티 소프트 형태의 게임기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내었다. 그리고 훗날 게임보이의 통신기능을 극도로 살려낸 게임이자 사토시와, 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의 한 일러스터 3명이 만들어낸 포켓몬스터로 게임보이는 다시 한번 80년대 후반의 영광을 재현하며 최근 들어서는 게임보이 어드벤스로 휴대용 게임기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com )의 "NGC > 게임 게시판 > 정보 게시판"에 링크의 대모험 님이 작성하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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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스틱이 유선이지만 레볼루션은 무선입니다.

참고:

UBI 소프트 회장이 말하는 레볼루션!

일렉트로닉 아츠의 산하의 EA 캐나다 사장 John Schappert

「처음엔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별 기대를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한번 접해보시면 매우 정확한 조작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실겁니다. 스크린을 향해 팔을 움직이면 당신이 원하는 동작이 어떤 것이든 모두 인식을 합니다.」



레볼루션의 리모트 콘트롤러는 3차원을 인식하기 때문에, 이 영상과 같이 콘트롤러의 움직임을 3차원적으로 인식 할 것입니다. (플레이하는 사람의 모습이 좀 허접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마지막 동영상은 HMD(Head Mount Display)와 큐브맵(Stereo cubemap panoramas)이 결합한 영상입니다.
레볼루션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고, 다만 큐브맵핑이란 것 정도만 들려오던 얘기죠.
텍스쳐는 24개 쓰였네요. 그 자리에서 보는 것만 가능한 상태 정도같군요.

참고로 이번 CES에서 닌텐도가 아래의 제품을 샀다는 루머가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이 회사는 주로 3차원 버추얼 리얼리티에 관한 제품을 제작하는 회사입니다.
회사의 홈페이지에서 CG 동영상을 텍스쳐로 활용하는 프로그램도 다운받아 볼 수 있습니다.

보너스:



스텝에 주목해 주세요.. ㅡㅡ;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com ) 에서 NGC > 게임 게시판 > 정보 게시판체 게바라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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